돌아온 멕시코

스키퍼 늬우스

2025.03.23 | 조회 133 |
0
|
스키퍼 매뉴얼의 프로필 이미지

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멕시코 중부 태평양 연안의 반데라스 베이Banderas Bay에서 인사드립니다. 반데라스 베이는 혹등고래들이 새끼를 출산하는 곳으로 유명한데요, 그 때문인지 어제 오전에는 만 안에서 고작 10여 마일 배를 움직이는 동안 고래를 열 마리도 넘게 봤답니다. 단순히 헤엄치며 이동하는 게 아니라 수면에 머물며 장난치고 노는 듯한 녀석들도 만났습니다. 먼바다에서 마주치던 고래들보다 왠지 여유가 있어 보이더군요. 미쿡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휴양지라 유명 리조트와 상업시설이 해안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지만, 이 곳은 진정 고래들의 나와바리인 것 같습니다.

종종 배와 충돌 사고가 있다는 말에 (고래가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다며)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얼마전 세일요트와 충돌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낮에 4노트 느린 속도로 세일 항해중이던 배 뒤편에서 갑자기 고래가 올라왔다더군요. 배꼬리 태양광 패널 두 개는 완전히 파괴되고, 찌그러진 캠클릿에 9인치나 되는 고래 피부가 찢겨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고래라고 어리버리한 녀석들이 없으라는 법이 없죠. 그동안 영민한 고래들의 높은 지능을 믿고 있었는데, 이젠 경계를 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항해를 끝으로 호라이즌스 호에서 완전히 내린다던 저는 저는 왜 여기서 고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길지만 그 시작은, 홀로 멕시코에 가려던 선주가 미국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김에, 선주는 새로 산 집수리에 합류해 밤낮으로 함께 일했습니다. 멋진 바다 뷰를 자랑하는 새 집 거실에선 집 앞 작은 항구도 보이는데, 그 한쪽에 묶인 호라이즌스 호를 자꾸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고 바로 배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개인 항구는 아니더라도 집앞에 배를 댈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에, 호라이즌스 호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구독자님, 혹시 관련해서 경험이나 정보가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집수리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덧 산블라스에 더위가 찾아올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작년, 우리가 머물 때도 매우 더웠지만, 그 이후에 남아있던 친구 배는 참지 못하고 세일링 요트에 무려 에어컨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저도 함께 가서 배 상태를 살피고 준비를 도와 빨리 물에 내린 뒤 근방 세일링이나 좀 하고 오기로 했습니다.

산블라스에 도착하고 보니 딱 일년이 지나 있더군요. 이번엔 더위와, 특히 모기와 헤헤네 대비를 철저히 하고 왔는데 이게 웬일? 아침엔 오히려 추워서 자켓을 입어야 했고, 동네를 뒤덮던 헤헤네도 얌전한 느낌이었습니다. 슈퍼엘니뇨 때문에 작년에만 유난히 덥고 벌레가 많았던 걸까요?

"올해는 날씨도 안 덥고, 헤헤네도 별로 없는 느낌인데!"

"ㅎㅎ.. 좀만 기다려봐"

어느덧 친구가 된 마리나 매니저의 반응은 이랬지만요.

열대지방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배는 상태가 좋았습니다. 역시나 친구가 된 마리나 크루들이 배를 잘 관리해준 덕입니다. 그래도 일 년 만에 돌아와 배를 점검하니 이런저런 문제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중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러더 힌지 부분 두 개의 큰 블라스트였습니다. 잔뜩 곪은 종기처럼 부풀어 오르고 녹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죠. 업계는 떠났어도 이럴 때 연락할 수 있는 네트워크 덕에 이태리 보트빌더 친구에게 구체적인 제품명과 처치 방법을 얻었지만 문제는, 여기는 멕시코 중부의 시골마을 산 블라스. 시간도 촉박했습니다. 수심 낮은 강에 위치한 탓에 배를 내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거든요. 결국 응급처치만 간신히 마치고, 고장난 냉장고도 수리하지 못한 채 출항했답니다.

멕시코에서 세일링 30년차라는 캐나다 친구 잭이

"생선을 잡으면 식초에 보관하면 되고, 맥주 대신 데낄라를 마시면 돼."

라고 한 말에 영감을 받아 냉장고 없이 출항했는데, 이거, 할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에 썰어놓은 토마토가 오후엔 쉬어 있곤 하거든요. 고장 잦은 화장실에 질려서 아예 없애버리고 바케스 요강을 쓴다던 잭. 난생 처음 보는 정크 세일을 단 특이한 철선에 화장실조차 없다고 했을 때 의구심을 품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번 항해는 길지 않습니다. 호라이즌스 호에서의 이전 항해가 대부분 호러와 패닉의 기억이어서, 이번엔 좀 즐거운 추억을 쌓고자 2-3주 근교 세일링 중입니다. 그런데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근방을 돌다 결국 다시 산블라스로 돌아가 배를 올릴 생각을 하니 동기부여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어딘가 '가야하는' 항해에서, 순수하게 '즐기기 위한' 항해로 모드 전환을 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군요. 오로지 후자의 목적으로만 항해를 하던 지중해 시절이 까마득합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스키퍼 매뉴얼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이전 뉴스레터

다음 뉴스레터

© 2025 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

뉴스레터 문의info@easysailing.kr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