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연구실 한구석에서 연구를 하던 시절, 저를 가장 흥분시켰던 뉴스는 단연 ‘IOC와 사우디의 협력’ 소식이었을껍니다. 전통 스포츠의 최고 권위인 IOC와, ‘오일머니’를 앞세워 이스포츠의 새로운 메카를 꿈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만남. 학계에서는 이것을 ‘이스포츠의 올림픽 편입’이라는 오랜 숙원을 풀 열쇠이자, 이스포츠가 ‘서브컬처’에서 ‘주류 문화’로 진입하는 티핑 포인트가 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묘했습니다. 지난 2025년, 사우디에서 열린 ‘이스포츠 월드컵(EWC)’이 성황리에 막을 내린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디 측은 독자적인 ‘이스포츠 네이션스 컵(Esports Nations Cup)’을 예고하며 IOC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거리두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2025년부터 진행 예정이었던 이스포츠 올림픽이 2년 연기된다는 발표가 나온 지 그리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이질감 있게 느껴졌지요.
그러다가 결국 지난 해 11월 3일, IOC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상호 간의 파트너십을 1년 3개월 만에 종료한다고 전격 발표하였습니다. 이 때 IOC는 '양 당사자가 각자의 각자의 e스포츠 목표를 별도의 경로로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고 발표하였는데요. 그 동안 대외적으로는 원활하게 협력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둘은 ‘이스포츠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은 왜 이 거대한 두 공룡이 사실상의 ‘전략적 결별’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깊은 내막을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선: "이스포츠는 21세기의 석유"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비전 2030’의 핵심은 탈석유 시대의 먹거리 발굴입니다. 그들은 게임과 이스포츠를 단순한 놀이가 아닌, ‘엔터테인먼트이자 문화 산업’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스포츠 산업에 대한 태도는 크게 2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 압도적인 자본 투입: 사우디 국부펀드(PIF) 산하의 ‘새비 게임즈 그룹(Savvy Games Group)’은 게임 산업에만 약 380억 달러(한화 약 50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IESF(국제이스포츠연맹)의 회장사를 맡으며 국제 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Gamers8’을 통해 2023년에만 총상금 4,500만 달러(약 600억 원) 규모의 대회를 치러냈고, 발전시켜 이스포츠 월드컵이라는 이스포츠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회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상업성과 대중성의 추구: 사우디가 주목한 것은 ‘우리가 아는 이스포츠’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카운터 스트라이크 2>, <배틀그라운드> 등 전 세계 수억 명의 젊은 층이 열광하는 타이틀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 활동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뷰어십을 끌어오고 관광객을 리야드로 불러들일 수 있느냐였습니다. 이는 사막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폐쇄적인 국가 이미지를 ‘젊고 현대적인 국가’로 변화하려는 고도의 정치·문화적 전략이기도 합니다.
즉, 사우디는 이스포츠 산업을 ‘가장 트렌디한 디지털 문화 상품’으로 바라보면서 국가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IOC가 바라보는 이스포츠에 대한 시선은 사뭇 다릅니다.
IOC의 시선: "땀 흘리지 않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반면, 스위스 로잔(IOC 본부)의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토마스 바흐 전 IOC 위원장은 줄곧 "폭력적인 게임은 올림픽 가치(Olympic Values)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또한 "올림픽은 전통적인 스포츠가 e스포츠를 이끌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스포츠와 e스포츠 간의 입장을 일종의 상하 관계로 두는 발언 또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IOC가 e스포츠를 바라보는 시선을 정리해 본다면,
- 올림픽 아젠다 2020+5의 함정: IOC는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디지털 전환을 시도했지만, 그 방식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습니다. 2021년 ‘올림픽 버추얼 시리즈(OVS)’와 2023년 싱가포르 ‘올림픽 이스포츠 시리즈(OES)’의 종목을 봅시다. <즈위프트(사이클)>, <버추얼 레가타(요트)>, <저스트 댄스>, <틱택보우(양궁)> 등이 주를 이뤘습니다. 즉, 기존의 스포츠 종목들을 디지털화 하여서 이스포츠화 시킨 종목들이 주를 이룹니다.
- 신체적 탁월성(Physical Excellence)에 대한 집착: IOC가 정의하는 이스포츠는 ‘신체 활동을 돕는 도구로서의 가상 스포츠(Virtual Sports)’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조작하는 게임보다는, 실제로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행위가 포함되어야만 올림픽 정신에 부합한다고 믿습니다.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괴리가 발생합니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진짜 이스포츠(LoL, FPS 등)’는 배제되고,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명분은 좋은 ‘시뮬레이션 스포츠’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결별의 원인: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
결국 IOC와 사우디의 ‘전략적 결별’은 [문화 산업 vs 신체적 스포츠]라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사우디(EWC)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 게이머들이 열광하는 최고의 쇼를 만들고 싶은데, IOC의 기준을 따르자니 인기 게임을 다 빼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IOC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IOC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이라도, 게임이 오륜기 아래에 스포츠와 동등하게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신체적 스포츠가 주도하는 이스포츠를 원한다"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사우디가 최근 발표한 ‘이스포츠 네이션스 컵’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됩니다. IOC가 주관하는 ‘올림픽 이스포츠 대회’가 흥행성 떨어지는 버추얼 스포츠 위주로 흘러갈 것을 대비해, 자신들은 인기 종목을 꽉 채운 ‘진짜 국가대항전’을 따로 만들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결론: 한국, ‘두 마리 토끼’를 향한 정교한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최근 한국 정치권의 움직임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몇몇 국회의원을 필두로 ‘올림픽 이스포츠 대회’ 유치 및 조직위원회 설립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냉철해져야 합니다.
- 올림픽 이스포츠(OEG)의 가치: 물론 올림픽과의 연계는 중요합니다. ‘게임은 질병’이라는 기성세대의 부정적 인식을 타파하고, ‘이스포츠도 땀 흘리는 스포츠’라는 명분을 통해 학부모와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습니다. 국민 건강 증진이라는 공익적 목표와도 부합합니다.
- 종주국의 현실적 딜레마: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이 ‘이스포츠 종주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즈위프트>나 <저스트 댄스>를 잘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페이커로 대변되는 <LoL>, 그리고 수많은 프로게이머가 활약하는 인기 종목(PC/모바일 게임)에서의 경쟁력이 우리의 자산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는 ‘투 트랙(Two-track)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사회적 인식 개선과 생활 체육으로의 확장을 위해 IOC 류의 ‘피지컬 이스포츠’를 지원하는 한편, 산업적 경쟁력과 글로벌 팬덤 유지를 위해 사우디가 주도하는 ‘커머셜 이스포츠’에 대한 선수 육성과 지원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IOC와 사우디는 갈라섰지만, 한국은 그 둘을 모두 취해야 합니다. 명분(신체 기반 이스포츠)과 실리(대중이 좋아하는 이스포츠), 이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이스포츠 흐름을 모두 읽고 대비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도 이스포츠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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