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16 어떤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약간은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더

2025.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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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F1 노트

F1과 이런저런 탈것경주 잡담들. 매월 첫째, 셋째 주 화요일에 보내드립니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p입니다. 

 

네덜란드 GP, 잔드보르트 주말을 조금 멀리까지 가서 살짝 체크한 주말이었습니다. 잠시 "바깥"에 와 있는 김에 살짝 개인적인 이야기를 (또 한 번)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라는 글을 몇 주 전에 보내드렸었지요. 돌아보면 참 겁도 없이 모호한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썼고/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발생하는 일일까요. 하지만 모호하더라도 그 '느낌'은 분명한데.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저는 아직은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찾았다고 해도 스스로 그 방법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고요). 

 

저는 지금 마라넬로에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쪽의 작은 마을이죠, 간단히 구글해보니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러면 한국식 행정구역 구분으로는 면 정도 되겠네요. 조용한 민박집에 앉아 랩톱을 펼쳐 놓고 이 편지를 두드리기 시작한 지금은 여기 시각으로는 9월 1일 월요일 오후 4시 23분, 제 아이폰이 비교-계산해준 서울 시각은 밤 11시 23분이라네요. 간만에 꽤 멀리까지 나오긴 했다는 걸 이럴 때 실감합니다. 바깥 기온은 28도 습도는 48%, 날씨는 아주 맑습니다. 바람은 선선한 편인데 햇볕이 종일 뜨거웠어요. '지중해성 기후'에 기대하는 여름날일까요. 9월이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탈것경주의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라는 오랜 농담 - 약간의 진심도 담긴 - 은 이어집니다. 

동네 이름이 곧 어떤 상징처럼 작동하는 곳들이 있지요. 종교에서는 바티칸이나 메카가 그렇고 테니스에서는 윔블던이나 롤랑 가로스가 그렇겠군요. F1에서도 팀 본부/공장이 위치한 동네 이름을 팀의 이음동의어처럼 쓰는 일이 드물지않으니 어쩌면 사람들이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좀 비슷비슷한 면들이 있는 것도 같아요. 하지만 워킹을 이야기할 때나 브래클리를 이야기할 때와 '마라넬로'를 이야기할 때에는, 네, 어쩐지 작은따옴표가 필요해집니다. 저는 '빨강 팀' 서포터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 가능성이 높아보이는데도. 

그럼 저는 여길 왜 온 걸까요. 그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정말로 탈것경주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돈과 시간으로 잔드보르트+몬차 백 투 백도 가능했을 텐데, 그만큼의 비용을 들여 이 '작은 마을'을 굳이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지난 (날짜상으로)사흘간 틈틈이 물어보았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정의하지 못하는 감각, 모호하게 인지하면서도 또렷한 말로 설명하려면 괴상한 비유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막연한 생각들에 대한,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 어떤 근사값.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 지금 스스로에게 돌려줄 수 있는 답은 '호기심' 같아요. 

 

좋은 드라이버, 드라이빙 스타일, 유산legacy, 재미, 흥미로움, 전설, 역사, 이야기. 

하나하나 짚어보면 저도 개념 정의를 제대로 하지 않은+못한 채 쓰고 있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무심결에 쓰고 있는 뜬구름잡기. 운전은 할 줄 알지만 정식으로 "레이싱"을 해 본 적은 없는데도 대뜸 레이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요. 보는 입장과 하는 입장이 같을 수가 없을 게 당연한데 - 그런데 그것조차, 당연한 게 맞을까요? 사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 같은 건 없는, 없었을 수도 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고 어떤 기준도 없다면 모든 것이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 "자유"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일까요? 기준이 없는 개념은 성립합니까? 상상의 감정, 현실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는 어떤 성격을 덮어씌워 이입하기, 수많은 사물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인화해 말하기. 이 모든 물음표들이 남기는 막연한 감각들이 있습니다. 걷다 보면 생각이 많아질 때도 있고 복잡한 머릿속이 비움/정리될 때도 있는데 어떤 산책길은 전자였어요. 그렇게 걷다가 우연처럼 - 우연은 아닙니다, 거기 있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 마주하게 된 풍경이 남긴 인상을 이 흐트러진 말뭉치로나마 전하고 싶었습니다. 

8월 30일 토요일, 해질녘의 피오라노
8월 30일 토요일, 해질녘의 피오라노

스쿠데리아 페라리 열성 - 극성? - 팬들을 가리켜 이탈리아어 원어 그대로 살려 '티포시'라고들 하죠(복수형이라 여남 구분해서 여자면 tifosa 남자면 tifoso라 적는 게 맞다고 꼼꼼하게 따지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미 거의 고유명사처럼 자리잡은 것같긴 합니다). 이들의 뜨거움은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 유명한데, 그 응원을 그리스-로마 신화 속 세이렌들의 노래에 빗대어 말하는 분들도 꽤 계시죠. 저항할 수 없이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게 세이렌 전설의 핵심요소라 저 티포시-세이레네스 비유는 꽤 적절한 듯도 합니다. 세이렌이 두 차례 목표-유혹 및 파멸에 실패한 이야기도 함께 전해오는 것까지도요. 그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서 돛대에 묶이기를 선택한 오디세우스하고, 세이렌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그들을 꺾었다는 오르페우스 이렇게 둘이 있죠. 

 

해질녘 텅 빈 피오라노를 보며 이 바깥쪽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 안을 달리던 빨강 차를 탄 드라이버들을 떠올렸습니다. 들어갈 수 없는 그 바깥에서, (우리에게)챔피언십을 가져다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 누군가는 야망을 갖고서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그들을 둘러쌌던/둘러싸는 그 모든 간절함. 갈망. 전설로 남은 "이름"들. 일단 빨강 차를 타는 운전자가 되는 순간 저 모든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는 - 될 수도 있다는 - 감각, 저건 다른 탈것경주팀에는 현 시점엔 없고 앞으로도 가지기 어려울 매혹이라고 생각해요. 남드라이버남들에게는 특히나 더더욱 거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들렀던 마라넬로의 페라리 박물관이 그랬어서요. 팀La Scuderia의 이야기/역사La storia를 이야기하는데 그 얼굴과 주역들은 전부 남자들이니까. 이 팀의 "역사"를 고려하면 그건 좀 의외의 - 또는 뻔한 - 측면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긴 [오디세이아]에서도 오디세우스한테 세이렌 조심하라고 알려주고 스킬라와 카립디스가 있는 바닷길도 경고해 준 인물은 키르케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지 키르케나 페넬로페가 아니기는 했네요.

싹 다 백인 남자들 얘기이다시피한 거야 탈것경주계의 오랜 병폐라지만, 실버스톤 뮤지움도 무제오 페라리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 "박물관"을 보러 온 사람들 성비는 대충 반반같은데 그 모든 영광과 이야기와 전설들은 싹 다 남자들 얘기뿐이라, 이렇게까지 여자가 없을 수가 없는데 -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긴 하겠더라고요. 잔드보르트 2025 주말에 F1아카데미에서 빨강 옷을 입고 빨강 차를 탄 마야가 우승한 걸 (중계로나마)본 이후여서 더 그랬던 것도 같고, 어쩌면 해밀튼이 지금 "스쿠데리아"에 일으키고 있는 균열 같은 게 있다면 그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보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결국엔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누가 해 주는 것들엔 한계가 분명할 테니. 좋은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거고 그게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수도 있을 거예요, 바라는 데 그치지 않고 뭔가를 실제로 해 볼 마음까지 이어진다면 더 좋겠죠. 길이 정해져 있는 것같이 보여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하기 나름이니까. 

 

내일, 그러니까 이 편지 받아보실 날 기준 오늘 저는 엊그제/그끄제 왔던 길을 살짝 되짚어 밀라노로 갑니다. 그 다음엔 동행을 만나 그랑프리 주말을 서킷 오가며 보낼 거예요. 속도의 사원Temple of Speed라고들 하는 그곳을 향해 무슨 순례길 걸어보는 무신론자처럼 움직이게 생겼습니다. 게다가 초행인데.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해 왔으니 앞으로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 정도의 느긋한 감각으로 다니고 있지만 글쎄요 과연 언제까지 느긋할 수 있을지는... 부디 별 탈 없이 일정 잘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랍니다, 크고 작은 행운들도 따르면 좋겠고요. 그리고 혹시나 만약에 약간의 여유가 있으시다면, 구독자님, 저뿐만 아니라 어떤 드라이버에게도 좋은 레이스 주말이 되기를 기원해주십시오. :)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편지는 9월 16일에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앞서 따로 보내주셨던 구독자 질문들에 대한 답, 잔드보르트 이야기는 그때까지 좀 더 다듬어보겠습니다. 당장은 다가오는 이번 주말 몬차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오가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어떤 기대라는 것을 가져봅니다. 실망하게 되더라도 또다시 기대하게 하는 힘- 이란 것도 있는 것 같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즐거운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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