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12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약간은 개인적인 이야기

2025.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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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F1 노트

F1과 이런저런 탈것경주 잡담들. 매월 첫째, 셋째 주 화요일에 보내드립니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p입니다. 

 

오스트리아와 영국 GP를 연이어 치르고 나니, 어쩐지 평소같은 소식들 모아놓기나 기록지 붙여놓고 세션 보며 트윗했던 것들 갈무리하는 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더 개인적인 -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탈것경주 특히 F1의 계절은 저한테는 언제나 여름의 이미지입니다. 프리시즌테스팅은 아주 이른 봄 내지는 아직 다 물러가지 않은 겨울에 가깝고 챔피언십 결정될 즈음엔 대체로 가을이지만, F1 하면 떠오르는 계절은 여름이에요. 이 미친 탄소배출자들과 그 소식 전해 나르는 사람들, 그들을 구경할 사람들, 그 거대한 무리가 세계 곳곳의 - 그러나 어쩐지 매번 뻔한 - 여름들을 찾아가 “뻔하지 않은” 순간들을 위해 삽니다. 진짜 이상하고 미친 무엇인데 그것까지도 여름의 뜨거움을 닮았죠. 습하고 꿉꿉해서 짜증날 때도 있지만 타오르는 듯이 눈부신 날들도 있고요. 한낮의 해가 너무 뜨거워서 머릿속까지 익어버릴 것 같은 날에도 어느 순간 해질녘이 되고 저녁이 오고,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여름밤에는 긴 겨울밤 못지않게 별별 생각이 다 들 때가 있어요. 이건 F1보단 르 망 24시 같은 쪽이 주는 독특한 인상같긴 한데... 탈것경주의 여름들이란 참.

 

떠도는 이야기들, 오고가는 이미지들, 기록지 위 언뜻 명쾌해보이는 숫자들, 소수점 아래 세 자리까지를 보는 이 미친 빠르기의 난장판. 그 안에서 “계절”이 가고 누군가는 왔다 떠나고, 떠날 것같다가도 자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드물게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못할 길을 가서 신기루같은 무엇으로 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F1에서 드라이버 커리어는 참 짧죠. 극소수만이 정점에 오르고 - 내지는 그 근처에라도 가 볼 수 있고 - 대부분은 "사다리"를 오르다 떨어져나가거나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하고요. 예외의 예외들이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지금의 그리드. 같은 재능(이라는 게 있지도 않겠지만)을 가졌다 한들 기회도 과정도 꼭 공평하지만은 않아서 많은 우연이 겹치고 겹쳐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지요. 그리고 어느 드라이버든, 어떤 커리어를 가졌든, 끝은 언제가 되더라도 너무 짧습니다.

어떤 끝은 갑자기 오기도 합니다. 그냥 단순한 재계약 불발 문제일 수도 있고, 드라이버가 이룰 건 다 이루었다 생각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 밖의 다른 많은 이유들로도 커리어를 마무리하기도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고. 그건 정말로 준비할 수가 없지요. 별로 준비하고 싶지도 않잖아요? 이제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비 많이 오는 날의 레이스 도중 세이프티 카나 레드 플랙이 나오면, 그 일요일 스즈카에서 헬멧에 묻은 물기를 닦던 비앙키가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서 보내는 상찬은 무의미하죠. 그냥 매 순간을 아끼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무엇도 없는 것 같긴 해요. 저는 탈것경주를 "구경"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취미의 악취미적 측면을 느낄 때가 그런 순간이기도 합니다(스스로를 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저는 젠슨 버튼을 참 좋아했고 운이 좋아 그 드라이버의 커리어 후반부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고른 드라이버가 챔피언십 소지자이긴 했어도, 그 시점의 그리드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는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건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그냥 보였으니까). 멋진 순간들을 보았던 만큼, 커리어 끝자락에 저어기 뒷쪽에서 레이스 스타트하는 걸 보는 건 마냥 즐겁다 하긴 어려웠긴 해요. 버튼은 300GP를 넘겨 은퇴했습니다. 마지막 레이스는 DNF. 정점에서 물러서는 게 더 그럴듯한 그림이었을 수도 있죠. 예고된 끝이었는데도 보는 마음은 좀 복잡하더라고요. 그러게 체커드 플랙은 받고 가지 그랬어요 단추 선생. 적어도 나는 체커드가 나오긴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F1을 뒤집으면 IF가 된단 이야기를 할 정도로 수많은 변수들이 넘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말도 안되는 것 같은 무엇들 앞에서 물러서거나 포기한다기보단 또다시 도전한다는 점이 제게는 정말로 흥미롭게 보입니다. 완벽한 무엇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세상에서, 진짜 그런지 어떤지 어디 한 번 해보겠습니다 식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걸 구경하기를 제가 몹시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제 생각에 탈것경주 팀들은 항상 실수를 합니다. 드라이버들은 항상 이기적이고요. 어느 쪽에도 금칠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금칠하기처럼 보인다면 그건 제 표현이 부족해서일 겁니다). 넘을 수 없을 것같은 벽을 맞닥뜨리는 거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고, 이룬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을 수 있는데도 다시한번 그 모든 처음들을 시작해보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실 실수도 안 할 수 있어요.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것, 무엇이든지 해 보는 것. 

 

미치광이의 아무말일 수도 있죠 물론. 하지만 오직 서킷 안, 트랙 위에서만으로 한정짓더라도 어떤 드라이버들은 보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정을 줍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기록이든 순위든 상관없는 어떤 "순간"이란 게 있긴 있더라고요. 헬멧 쓰고 차에 탄 채로, 느린 구간에서였더라도 100km/h는 가볍게 넘길 빠르기로 지나가는데도 그게 된다고?! 싶겠지만 "보면 알아요" 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정말로 있었고 저는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게 중계 화면이더라도요. 

드라이버에게도 팀에게도, 영원한 건 없기 때문에 정상에 섰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내려오게 되며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시간과 함께 기억은 흐릿해지고 그 기억들도 가끔은 동화가 어쩌면 전설처럼 '이야기'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할 거고요.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그걸 이끌었던/이끌고 있는 인물이 당연히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평범한 무엇이라고 착각해왔다는 걸 느끼는 사람들도 같이 늘어날 거라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전설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라는 게 있긴 있더라고요. 지금 내가 본 게 어쩌면 그런 <전설>의 단편일 수도 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더라는 이야기.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이 현재진행형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모터스포츠를 보는 사람이라면, 레이싱이 뭔지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종의 !! 모먼트를 겪고 나서는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지는 그런 면이 있다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애' 여부와 무관합니다. 드라이버가 그런 순간을 이룰 수 있게끔 -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런 여름날을 또다시 기다리게 되는 것 같아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순간들은 대단히 아름답기 때문에.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편지는 7월 22일에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레드불 링-실버스톤 이야기는 그때 까지 좀 더 다듬어보겠습니다. 여름방학 아닌 여름방학이어서 미디어비스무리들도 어지간히 말 얹고 다닐 것 같네요, 팝콘이나 준비하지 왜들 들들 볶는담... 시간 되면 저도 중요한 장면들은 다시 돌려보고 그러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팀의 25년만의 홈 그랑프리 1-2도 즐겨야만...; 

 

즐거운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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