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독해
텍스트는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장면 하나를 소환합니다.
바로 '거울 앞에 선 아이의 모습'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거울 단계’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아이는 처음으로 거울 속 형상을 보고 아래와 같이 외치며 환호합니다.
저게 나야.
하지만 텍스트에서는 어쩌면 감동적일 수도 있는 이 순간을 '발견'이 아닌 '오인(Misrecognition)'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왜 ‘발견’이 아니라 ‘오인’일까요.
거울을 보기 전까지 아이가 경험하는 자신의 몸은
통제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파편화된 신체'에 불과합니다.
아직 하나로 묶이지 않은 몸.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자아.
그런데 거울 속의 이미지는 다릅니다.
너무나 매끈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하나의 완결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느껴 온 혼란스러운 실체 대신,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나'라고 믿어버리기로 합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실제의 나가 아닌 '이미지로서의 나'와 사랑에 빠지는 첫 번째 단추를 꿰게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도 강조되었듯, 우리는 평생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거울, 사진, 카메라, 모니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나를 확인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게 정말 나인가?"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물으며 확인 받으려 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역시 또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칭찬, 비난, 좋아요 숫자 등.
우리는 그들이 비춰주는 이미지에 조금씩 자신을 맞춰 갑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느끼는 나이기보다, 점점 보여지는 나에 가까워집니다.
텍스트는 이 '오인'이 현대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증폭된다고 설명합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찾아주고,
SNS 프로필은 삶의 가장 매끄러운 장면만을 남깁니다.
AI는 내 생각을 정리해 주고, 내 감정을 더 그럴듯하게 표현해 줍니다.
그리고 나는 그 다듬어진 문장을 읽으며 안도합니다.
그래, 이게 나지.
그러나 이 문장은 내가 실제로 느낀 혼란과 머뭇거림과 어긋남을 삭제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이미지는 늘 완결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주체는 완결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의 괴리는 불안으로 남습니다.
결국 나는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편안해지면서도, 동시에
어딘가에서 미묘하게 멀어집니다.
이 좌표가 묻는 것은 ‘진짜 나를 찾으라’는 도덕적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어왔던 그 모습이
실상은 외부에서 주어진, 혹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미지’였음을
자각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일까요, 아니면 내가 투사한 나의 이미지일까요?
잠깐 멈춰 생각해보기
내가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내 감각이 살아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정리해 주었을 때인가요?
SNS 프로필 사진을 고르거나
여권 사진 속의 낯선 내 얼굴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던 적이 있나요?
그때 느낀 당혹감은
내 실체와 내가 만들어둔 ‘이미지’ 사이의 틈을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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