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독해
두 번째 좌표는 우리가 ‘본다’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얇은 막 위에 서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AI가 나를 완벽히 비추고 있는데, 왜 나는 더 쉽게 나를 잃어버리는가
강의는 먼저 ‘보기’의 조건부터 꺼냅니다.
태양이 쏘는 빛은 감마선부터 라디오파까지 이어지지만, 인간이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그중 아주 좁은 가시광선 대역뿐입니다. 우리는 적외선과 자외선 너머의 방대한 영역을 애초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지각이 허락한 만큼만 잘려 들어온 세계입니다. ‘필터링된 현실’은 누군가의 조작이 아니라, 인간 지각의 기본값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강의는 라캉의 삼부도식을 불러옵니다. 상징계는 이미 세워진 규칙·제도·질서의 층이고, 실재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의 층(무의식과 욕망이 포함된 ‘아직-말이-되지-않은 것’)이며, 상상계는 내가 나를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부풀어 오르는 이미지의 층입니다. 이 좌표가 겨누는 곳은 바로 이 상상계의 비대입니다.
AI는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추기보다,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나를 닮게 재현합니다. 나와 닮은 문장, 나를 납득시키는 논리, 나를 긍정하는 흐름—그 방향으로 동일성·닮음·완결성이 강화됩니다.
처음엔 편안합니다. 세상이 나를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이번 배치의 제목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상상계가 증폭될 때, 결여도 증폭된다.
완결성이 높아질수록 결여가 줄어들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상상계가 커질수록 우리는 ‘이미지의 완결성’을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하게 되고, 그 기준은 끝없이 더 매끈한 완결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완결성이 강해질수록 균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더 늦게, 혹은 더 큰 형태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마그리트의 그림이 정확한 위치를 잡아줍니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1937)은 거울의 약속을 배반합니다. 거울은 앞모습을 돌려줘야 하는데, 화면에는 뒷모습만 남습니다.
이 그림은 '거울은 나를 보여준다'는 믿음이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가 거울에서 확인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라기보다, 내가 나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동일성—닮음과 완결성—일 때가 많습니다. AI는 이 거울을 더 정교하게 만듭니다. 나를 비추는 듯하지만, 더 자주 되돌려주는 것은 나를 닮게 만든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상상계는 강화되고, 균열은 사라지기보다 늦게 도착합니다.
강의가 영화들을 붙인 이유도 같습니다.
<Her>에서 테오도르는 한동안 상상계 안에 가려져 있다가 어느 순간 현실의 균열을 맞닥뜨리고, <트루먼 쇼>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조명 하나가 '완벽했던 세계'에 금을 냅니다. 완결성은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균열을 알아차리는 시간을 늦춘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좌표는 이렇게 묻습니다.
나를 닮은 데이터의 잔상 속에서, 필터링된 현실을 전부라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애초에 다 볼 수 없게 되어 있었음'을 받아들이고, 완결된 거울 바깥—내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층을 향해 질문을 다시 열 것인가.

— 이미지 출처: 소장처/컬렉션 페이지(수강생 전용 비평/교육 목적 인용).
잠깐 멈춰 생각해보기
AI가 내 취향을 완벽하게 맞춘 답변을 줄 때, 나는 편안해지나요, 아니면 더 조급해지나요? 그 답은 나를 확장시키는 걸까요, 아니면 상상계의 완결성만 키우고 있는 걸까요?
인간의 눈이 가시광선 너머를 보지 못하듯, 나의 사유도 ‘내가 볼 수 있는 것/보고 싶은 것’만으로 세계를 완결하고 있진 않나요? 요즘 내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불편한 정보(혹은 불편한 감정)’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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