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ending studies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뉴스레터, 반드시 당일 발행할 필요는 없지요!

2026.04.21 | 조회 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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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관련 책으로 가득찬 책장
장애 관련 책으로 가득찬 책장

장애학을 공부한 뒤로, 나는 매일 장애인의 삶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본다. 읽을 거리가 많아 매일 24시간이 부족한 요즘이다. 지난주 토마토학교 36기도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김포공항(집)에서 용마산역(토마토활동 시작하는 곳)까지 가는 길이 멀어 힘들지만 설레는 마음 때문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이내, 얄밉게 올라와 있는 계단 한 개, 엘리베이터 고장 안내표지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떤 누군가가 느낄 불편함 때문인 줄 알았으나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그보다는 내 이면에 있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우선 순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더디지만 천천히 발전하고 있는 거겠지 하는 나름의 합리화. 그런 생각이 나를 불편하게, 그리고 부끄럽겠 했다. 그러한 나를 위로하는 건, 그나마 토마토학교를 아직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손에 쥔 장애학 책이었다. 장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쓰레기였을까?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장애에 대한 일기장 내용만 간추렸다. 

 


 

장애인을 공정하게 분류한다 - Categorizing 

 

분류 방법 소개하는 영상

 

공부하다 말고 풋살 코치님에게 DM을 보냈다. "풋살 선수들도 '스포츠의 공정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나요?" 예고 없이 날아온 질문에 꽤 당황스러우셨을텐데, 돌아온 답변은 예상보다 차분했다. "공정하다.......라.... 비디오 판독으로 어느 정도 공정성이 보완되긴 했죠. 하지만 딱히 '공정성'에 대해 고민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전통적으로 떠올리는 수업보다, 훈련하는 과정에서 '협력'과 '경쟁'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득하는 것 같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사람들은 내가 던지는 충동적인 질문에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섬세한 답을 보낸다. 그 답장을 읽으며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스포츠에서 '공정성(fairness)'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선수들과 관중은 흥미를 잃지 않을까? 혹은 '공정함'이란 애초에 실현 가능한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그저 믿고 싶어 하는 이념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정말로 공정한지 하나하나 따져 묻기보다는 그저 "공정할 것이다"라고 믿고 각자의 역할과 훈련에 몰두하는 편이 스포츠를 유지하는 데 더 필요할 것이라고. 어쩌면 스포츠는 공정성 그 자체보다 공정하다고 믿는 상태 위에서 굴러가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패럴림픽은 과연 공정할까?

 

장애학의 관점에서 패럴림픽 분류 체계는 공정함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경기 참여가 가능한 장애와 불가능한 장애를 가르며,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어떤 기능은 너무 유리해서 제한되고, (실제로 발달장애가 수영에 유리할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 있다.) 어떤 장비나 기술은 너무 뛰어나 허용되지 않는다. 공정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만, 누가 이 규칙을 만드는가? 어떤 몸과 어떤 능력과 기능이 기준이 되는가? 질문을 계속할수록 '완벽한 공정성'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느꼈다.

 

장애 범주 Impairment categories : DSM-5, Paralymics classification, etc

장애인이 손상(impairment)이 지닌 생물학적 기반을 토대로 분류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왔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관리 및 통제되어 왔으며, 결코 순수하게 과학적(생물학적)인 현상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원래 인간 승리 신화를 만들어내는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가끔 우연치 않게 지인들과 같이 경기를 보게 되면, 이겨서 술이 쫙쫙 잘 들어가고, 져서 꿀렁꿀렁 들어가는 정도로만 즐긴다. 하지만 패럴림픽은 얘기가 다르다. 공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이었을지라도 패럴림픽은 존재해야 한다. 패럴림픽이 능력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정교화시키는 중일 수도 있지만, 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감동 서사를 전시하고, 소비 가능한 이야기로 포장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장애인 스포츠'는 조금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골볼 소개 영상

 

가이드 러너와 함께 뛰는 시각장애인 마라톤, 특수 장비를 이용한 파라사이클, 소리를 통해 공의 위치를 파악하는 골볼처럼, 장애인 스포츠 종목은 더 많이 생겨나고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 참고로 20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는 83명이었다. 중국 282명, 브라질 253명, 영국 201명, 일본 175명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수다. 물론 선수 수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패럴림픽 선수들이 메달을 무려 30개(금6, 은10, 동14)나 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선수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다. 한국에서 패럴림픽을 생중계한 지상파 방송사는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다음 패럴림픽에서는 이 핑계를 대지 않을 것이다. 

 

 

여러 정체성이 교차한다 - Intersectional Identity 

 

내 몸에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 고래가 있다. (이전 뉴스레터에서도 밝혔던 것 같지만 한 번 더...) 스무 살 언저리, 지금처럼 문신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절에 어두컴컴한 곳에서 두 손 크기만 한 파란 고래를 몸에 새겼다. 생존을 위해서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바다생물. 나 역시 고래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강남과 강북 사이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결국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어느 부류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감각으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물을 표면 위로 힘껏 뿜어 올리면서 온 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이는 고래이고 싶었다.

이런 애매한 정체성으로 여행중 별의별 사람들을 만났다. 그후 한국에 돌아오니 한국 문화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홍콩 친구는 한국이 '안전하고 심심한 나라'라고 했다. 유럽이 야생이라면, 한국은 동물원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사는 듯 하지만 사실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사고를 하고, 비슷한 인생회로를 사는 한국. 우리는 단일한(unique but only one) 문화를 추구한다.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고 했던가?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국가가 이길 거라 생각한다.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고 했던가?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국가가 이길 거라 생각한다. 


한국인은 정말 비슷하게 태어나서, 비슷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비슷해지는 것일까?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특성을 먼저 돌아봤다. 먼저 작년 8월부터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 그는 인도계(인종), 무슬림(종교), 남아공(출신국가) 사람이다. 나는 얼마 전 그를 가족과 친구에게 소개했고, 서울숲, 이태원, 강남, 문래, 망원에서 인파 속 데이트를 즐겼다. 걱정과 다르게 그의 특성은 차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인의 남자친구, 그리고 여행자의 위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후, 영어학원에서 만난 원어민 선생님(백인, 남아공출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선주민’이 당연히 누려온 기회를 자각하는 동시에 ‘이주민’으로서의 차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 문화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를 남자친구의 삶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음은 우리 엄마. 엄마는 저소득층이자 장애를 가진 노인이다. 어렸을 적 폭탄인지 총인지 모를 큰 소음을 듣고 난 이후, 왼쪽 청각에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엄마는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를 하고 있을 때 내가 집에 들어와도 잘 모르고 있다가 "언제 왔어!?"하고 놀란다. 또 가끔은 엄마 본인도 모르게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내서 "엄마 화났어?"라고 묻게 되는 상황도 있다. 도서관 같이 조용한 곳에 가면 “엄마 목소리좀 줄여줘.“라고 알려드려야 하고, 엄마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면 나는 늘 엄마 오른편에 앉아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생활의 어려움(기본권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이 있을 정도로 크진 않다. 병원에서도 장애인 등록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다 키운 딸이 돈은 안 벌고 공부나 하고 있어서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국가에서 가난하다고 인정해준 덕분에 엄마는 그동안 아팠던 다리 수술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거동이 불편할 예정이다. 내가 그나마 간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cerpt for module materials Ayesha Vernon's research 수업 내용 발췌

시각장애를 가진 흑인 여성 장애학자 아예샤 버논(Ayesha Vernon)은 1990년대 중반, 영국 리즈에서 진행한 박사 논문을 통해 장애를 가진 흑인 및 소수 민족 여성의 경험을 분석했다. 그녀는 성별, 인종, 장애가 서로 분리된 정체성이 아니며, 성차별·인종차별·장애인 차별 역시 각각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이 요소들은 특정한 장소와 시점에서 서로 얽히며 작동하고, 그 결과 단순히 ‘이중적’이거나 ‘다중적인’ 억압이 아니라 맥락에 뿌리내린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인종이, 또 다른 상황에서는 장애가 더 두드러질 수 있으며, 억압의 형태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Ayesha Vernon, a blind black disabled woman, extended this analysis in her doctoral work on the experiences of disabled black and minority ethnic women here at Leeds in the mid-1990s. She argued that gender, race and disability aren’t separate forms of identity running alongside each other independently, nor are the forms of oppression, sexism, racism and disablism operating in parallel. Rather they interact and create a specific and changing experience, where one element may be at the fore or there may be a specific interaction between two forms of oppression all of which occur in specific locations and contexts. These are not ‘double’ experiences but rather are a single experience grounded in a particular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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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저마다 여러 특성이 합쳐진 고유의 정체성으로, 재미있고 반짝이는 삶을 살아 간다. 그 특성이 어느 시점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며, 그 경험은 다시 고유한 정체성(성격, 태도)을 만든다. 이 사이클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문제는 몇몇 특성들이 불평등한 경험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장애'의 경우,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하다", "대단하다", "조심해야 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사회화된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불평등한 상황, 조건을 만든다.

안타깝게도 '장애'는 인종, 성정체성, 젠더, 난민, 빈곤 등의 문제와 겹치는 경우가 많다. 이로인해 단순히 더 불평등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차별 경험이 만들어진다. (Double, multiple and simultaneous forms of oppression) 어린이 + 여성 + 이주민 + 흑인 + 성소수자 + 장애인 + ... 교차된 특성이 국가(아프리카, 남미, 유럽, 미국, 아시아)에 따라 다른 양상의 차별로 나타나는 걸 비교해 보면서, 케이스 스터디가 어디까지 다양해질 수 있는지, 장애 연구는 얼마나 더 방대할지, 나의 좁은 시야는 언제쯤 다 깨질지 몰라 짜릿했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단일한 곳에서는 이런 교차성이 '차이'라기 보다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다름이 눈에 잘 띄고 빠르게 판단되기 때문이다. 식당에 발달장애인 아들과 밥먹으러 갔다가 집단폭행으로 숨진 김창민 감독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차별도 아직까지 실재하지만, 침묵, 배제, 기회의 제한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차별은 더 깊게 뿌리박혀 있다.

가이드러너로 활동하는 내 동생도 얼마 전 다리 수술을 받았다.부쩍 날이 따뜻해지니 달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한다.
가이드러너로 활동하는 내 동생도 얼마 전 다리 수술을 받았다.
부쩍 날이 따뜻해지니 달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한다.

다시 남자친구와 엄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둘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인데, 이 둘은 자신을 긍정한다. "그게 뭐 어때?" 혹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이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특성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뿐, 차별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그가 갖고 있는 인도계, 무슬림, 남아공이란 특성이 제한 또는 억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적어도 남아공에서는 경험하지 못 했을 것이다. 엄마도 역시 불평등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그 특성 또한 일시적이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자신의 특성에 대해 사회적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성이 만들어 내는 정체성을 담담하게, 혹은 기꺼이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인다.

 

남자친구랑 동생들을 데리고 할랄인도음식점에 다녀왔다.한국에서 할랄 푸드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남자친구랑 동생들을 데리고 할랄인도음식점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할랄 푸드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 차별를 얘기할 때 '손상'과 '장애'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손상(impairment)은 개인이 가진 신체적, 의학적 특성으로, 그리고 장애(disability)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으로 인식해야 한다. 장애학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에 따르면 손상을 '키'나 '인종'처럼 한 사람을 구성하는 수많은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단순히 손상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회활동이 어려워지고 또 기회를 얻지 못 한다면, 이 문제의 원인은 사회에 있다고 패러다임을 바꾼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평등이니까 장애인 개인에게 화살을 돌려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는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이고 사회적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다.

내가 아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장애 문제는 장애 특성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특성을 해석하는 시선, 그 시선을 전제로 설계된 정책, 그리고 그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 구조다. 어떤 특성이 개인의 삶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그 특성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그 특성을 문제로 만들고 관리하며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따라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 아니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구나 하고 관심 갖는 날이 아니다. 장애인이 '손상' 때문에 겪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목소리를 보태는 날이다. 그러니 조금 길고 복잡해 보이더라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불러야 한다.

 

 

바쁜 백수이자, 배부른 대학원생 - Positionality

 

하는 일은 없는데 어째 캘린더가 빽빽하다. 4월이라 그런지 장애관련 행사가 유독 많았다. 최근 <장애학의 도전>의 저자인 김도현 선생님이 <장애학의 시선>이라는 책을 새로 펴냈다. 이를 계기로 제주노동권익센터와 제주장애인인권포럼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장애학 강의를 진행했다. 또 다른 날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울려 퍼진 안내 멘트를 듣고 참여하게 됐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작가님의 북토크였다. 유엔에서 발표한 인종차별철폐선언으로 시작해, 한국의 다문화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쉽게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에서 열린 세미나다. 미국에서 공부하시는 변재원 님이 미네소타에서 이민자 단속과 지역사회의 저항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지 전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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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이 아니다. 5월에는 장애인원영화제가 있어서 자활단으로 신청해 놓았고, 영등포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에서 열리는 '정신장애인 마을살이'라는 행사에도 참여해 지역사회의 사례를 알아볼 예정이다. 듣고 싶은 세미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건 '백수'라서 누릴 수 있는 특혜다. 마음껏 현장과 학계를 넘나들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지난 뉴스레터에 쓴 '장애에 대한 궁금증'에 답을 내려봤다. 

 

  1.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장애'가 과연 옳은가? 방금 한 말에 편견이 들어가 있진 않은가? 내가 생각해왔던 ‘장애’는 많은 편견을 포함하고 있었다. 장애를 이해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성찰’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차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2. 다른 사람들은 어떤 편견으로 장애를 생각하는가?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생각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정형화하기는 어렵다. 하나 분명한 것은 많은 편견이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상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에이블리즘(ableism)’이라고 불리며, 장애를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3. 토마토학교에서 학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을 대신해서 결정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도움을 받는 것일까 차별을 받는 것일까? 토마토학교의 첫날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는 부모님과의 대화다.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아이가 좋아하는 것, 어려워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질문한다. 그 옆에 '주인공'인 아동을 두고서. 이 시간 덕분에 짝꿍 선생님은 아이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잘 지켜줄 수 있을까?' '이 아이와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놀이보다 안전이 먼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단순히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은 ‘차별’이라기보다, 선생님은 장애를 이해하고, 아이들은 자기결정권을 연습하는 과정일 수 있다. 김도현 저자의 <장애학의 도전>에 따르면, "자기결정권의 핵심 요소는 판단과 소통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소통한다."
  4. 장애인은 교육해야 할 대상인가, 치료해야할 대상인가, 지원해야할 대상인가, 보호해야할 대상인가? 장애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장애'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자격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자격일까? 이 또한 질문 안에 비장애인중심주의적 시선이 담겨있다. 비장애인으로서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보통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라 답할 것이다. 비장애인은 독자적으로 정의하지 못 한다. 장애가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비장애, 이들을 관계적 개념(relational concept)이라고 부른다. 비장애인중심의 우리 사회는 장애가 무엇인지 분류하고, 장애인이 따라야 하는 규범을 만들어왔다. 비장애인을 정의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장애인을 분류해 배제한다. '장애 정의'는 학계의 풀리지 않는 의제다. 철학에서 지적장애를 '악몽'이라고 하는 것처럼 학문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에 쉽지 않다. 기존 정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대안적 정의를 제시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장애를 하나의 고정된 기준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보다는, 그 기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 장애인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에 가장 만족을 느낄까? 유럽국가에서 장애인은 어떤 평등을 누릴까? 장애인의 실질적인 요구를 알기 위해서는, 장애인 등록부터 개편해야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이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소외, 배제되는 미등록 장애인부터 포함시킨 뒤 욕구 조사를 해야 한다. 놀랍게도 OECD 국가의 평균 장애인 출연율은 25%다. 4명 중 한 명을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다. 반면, 한국 장애인개발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장애인 비율은 5.1%에 불과한 것으로 발표됐다. 100명 중 5명을 장애인으로 본다. 이는 인도와 케냐와 비슷한 수준이다. (인도 2.2%, 케냐 2.2%, 남아공 15%, 프랑스 13.6%, 캐나다 22%, 파키스탄 24%) 한국에만 유독 장애인이 적을 리 없다. 고령인구층이 많은 한국에 장애인이 적은 이유는, 장애인 등록 기준을 높여서 소수의 심각한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만 '장애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제도적으로는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 자격이 없으니 지원에서 제외된다. 영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1/5 이상이 장애를 가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장애인 실업률도 비교적 낮게 나타난다 (Hansen, Andreassen and Meager, 2011). 장애인의 규모가 크기 때문인지, 당사자 간 연대와 권리옹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비장애인의 참여도 적지 않다. 또한 장애 관련 조사에서도 단순히 장애인 수만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득, 주거지, 가족형태, 인종 등 다양한 사회적 조건을 함께 조사하고 이를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한다. 덕분에 한국에서 공부하는 나조차도 다양한 조건을 기준으로 영국 사회 내 장애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장애인의 범위를 좁히면 사회적 지원은 시혜로 남게 되지만, 범위를 넓히면 권리로 확장된다. 물론 영국과 한국을 단순히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세금 구조도 다르고, 복지 체계와 사회적 ‘상식’ 역시 다르다. 같은 유럽권에서도 조차 (노르웨이와 영국) 장애인 통계를 일대일로 비교해선 안 된다는 논문이 있다. 다만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되, 참고할 만한 점은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가져올 필요는 있어 보인다. 아니 가져왔으면 좋겠다.
토마토학교 36기 단체 사진, 다양한 우리가 좋다.
토마토학교 36기 단체 사진, 다양한 우리가 좋다.

 

장애학 연구는 '관찰'이 아니라 '프란시스'의 '개입'이다.

 

그동안 프란시스 다이어리는 내가 직접 '관찰(Observation)'한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지 느낌가는대로, 일기처럼 편하게 써왔다. 하지만 뉴스레터가 점차 '성찰(Reflection)'일지가 되어 간다. 특정 주제나 이슈를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위치성(Positionality)을 자각하고, 내 주관적인 생각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보는 과정이다. 끝내 나는 비장애인중심으로 생각하는 내가 과연 장애학을 공부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그것이 장애학의 일부라고 한다.

한 번은 지도교수님께 개인적인 질문을 털어놓았다. "저도 지금 제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명확한 커리어 계획도 없이 장애학을 공부(연구)해도 되는 걸까요?" 오지랖 그만부리고 공부에서 손 떼! 라고 할 줄 알았지만, 교수님은 대신 논문 하나를 소개해주셨다. 

Stone, E. & Priestley, M. (1996), Parasites, pawns and partners: disability research and the role of non‑disabled researchers.

이 논문의 저자는 비장애인 연구자다. 비장애인의 위치에서 장애학 연구를 해온 저자의 고민과 방법이 잘 드러난 글이었다. 장애라는 억압의 조건에서 객관성(objectivity)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위치성(positionality)을 분명히 드러내는 태도가 옳다고 주장한다. 즉, 장애학 연구는 자신의 시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드러내고 인정한다. 그리고 주관성을 숨기지 않고, 정치적으로 발화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에게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30년 전 쓰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진보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빈곤 경험 역시 많은 장애인들이 구조적으로 겪는 문제다. 어떤 거대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나의 경험은 장애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분야를 공부해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것이 이 논문이 말하는 장애학 연구의 자세다.

자료를 저렴하게 인쇄하고 제본할 곳, 추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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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보내주신 메일 내용 발췌

In terms of your personal position and experiences of precarity, I would say this is highly relevant – it seems like you are picking up here on the exactly what considering positionality can do. You are recognising aspects of your experiences that might contribute to privilege or distance from the experiences of disablement and you are also recognising points of understanding and connection in relation to poverty which is a phenomenon often experienced by disabled people. I think you are better placed than me to articulate how your experiences are relevant to your position as a researcher. 

개인적인 위치와 경제적 불안정의 경험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위치성(positionality)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경험 가운데 일부가 장애 경험과 일정한 거리나 특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장애인이 구조적으로 겪는 현상인 빈곤과 연결되는 이해와 공감의 지점 역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연구자로서의 위치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당신 자신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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