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학을 공부한 뒤로, 나는 매일 장애인의 삶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본다. 읽을 거리가 많아 매일 24시간이 부족한 요즘이다. 지난주 토마토학교 36기도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김포공항(집)에서 용마산역(토마토활동 시작하는 곳)까지 가는 길이 멀어 힘들지만 설레는 마음 때문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이내, 얄밉게 올라와 있는 계단 한 개, 엘리베이터 고장 안내표지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떤 누군가가 느낄 불편함 때문인 줄 알았으나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그보다는 내 이면에 있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우선 순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더디지만 천천히 발전하고 있는 거겠지 하는 나름의 합리화. 그런 생각이 나를 불편하게, 그리고 부끄럽겠 했다. 그러한 나를 위로하는 건, 그나마 토마토학교를 아직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손에 쥔 장애학 책이었다. 장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쓰레기였을까?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장애에 대한 일기장 내용만 간추렸다.
장애인을 공정하게 분류한다
Categorizing
공부하다 말고 풋살 코치님에게 DM을 보냈다. "풋살 선수들도 '스포츠의 공정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나요?" 예고 없이 날아온 질문에 꽤 당황스러우셨을텐데, 돌아온 답변은 예상보다 차분했다. "공정하다.......라.... 비디오 판독으로 어느 정도 공정성이 보완되긴 했죠. 하지만 딱히 '공정성'에 대해 고민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전통적으로 떠올리는 수업보다, 훈련하는 과정에서 '협력'과 '경쟁'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득하는 것 같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사람들은 내가 던지는 충동적인 질문에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섬세한 답을 보낸다. 그 답장을 읽으며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스포츠에서 '공정성(fairness)'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선수들과 관중은 흥미를 잃지 않을까? 혹은 '공정함'이란 애초에 실현 가능한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그저 믿고 싶어 하는 이념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정말로 공정한지 하나하나 따져 묻기보다는 그저 "공정할 것이다"라고 믿고 각자의 역할과 훈련에 몰두하는 편이 스포츠를 유지하는 데 더 필요할 것이라고. 어쩌면 스포츠는 공정성 그 자체보다 공정하다고 믿는 상태 위에서 굴러가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패럴림픽은 과연 공정할까?
장애학의 관점에서 패럴림픽 분류 체계는 공정함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경기 참여가 가능한 장애와 불가능한 장애를 가르며,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어떤 기능은 너무 유리해서 제한되고, (실제로 발달장애가 수영에 유리할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 있다.) 어떤 장비나 기술은 너무 뛰어나 허용되지 않는다. 공정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만, 누가 이 규칙을 만드는가? 어떤 몸과 어떤 능력과 기능이 기준이 되는가? 질문을 계속할수록 '완벽한 공정성'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느꼈다.
원래 인간 승리 신화를 만들어내는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가끔 우연치 않게 지인들과 같이 경기를 보게 되면, 이겨서 술이 쫙쫙 잘 들어가고, 져서 꿀렁꿀렁 들어가는 정도로만 즐긴다. 하지만 패럴림픽은 얘기가 다르다. 공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이었을지라도 패럴림픽은 존재해야 한다. 패럴림픽이 능력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정교화시키는 중일 수도 있지만, 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감동 서사를 전시하고, 소비 가능한 이야기로 포장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장애인 스포츠'는 조금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가이드 러너와 함께 뛰는 시각장애인 마라톤, 특수 장비를 이용한 파라사이클, 소리를 통해 공의 위치를 파악하는 골볼처럼, 장애인 스포츠 종목은 더 많이 생겨나고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 참고로 20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는 83명이었다. 중국 282명, 브라질 253명, 영국 201명, 일본 175명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수다. 물론 선수 수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패럴림픽 선수들이 메달을 무려 30개(금6, 은10, 동14)나 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선수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다. 한국에서 패럴림픽을 생중계한 지상파 방송사는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다음 패럴림픽에서는 이 핑계를 대지 않을 것이다.
여러 정체성이 교차한다
Intersectional Identity
내 몸에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 고래가 있다. (이전 뉴스레터에서도 밝혔던 것 같지만 한 번 더...) 스무 살 언저리, 지금처럼 문신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절에 어두컴컴한 곳에서 두 손 크기만 한 파란 고래를 몸에 새겼다. 생존을 위해서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바다생물. 나 역시 고래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강남과 강북 사이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결국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어느 부류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감각으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물을 표면 위로 힘껏 뿜어 올리면서 온 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이는 고래이고 싶었다.
이런 애매한 정체성으로 여행중 별의별 사람들을 만났다. 그후 한국에 돌아오니 한국 문화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홍콩 친구는 한국이 '안전하고 심심한 나라'라고 했다. 유럽이 야생이라면, 한국은 동물원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사는 듯 하지만 사실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사고를 하고, 비슷한 인생회로를 사는 한국. 우리는 단일한(unique but only one) 문화를 추구한다.
한국인은 정말 비슷하게 태어나서, 비슷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비슷해지는 것일까?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특성을 먼저 돌아봤다. 먼저 작년 8월부터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 그는 인도계(인종), 무슬림(종교), 남아공(출신국가) 사람이다. 나는 얼마 전 그를 가족과 친구에게 소개했고, 서울숲, 이태원, 강남, 문래, 망원에서 인파 속 데이트를 즐겼다. 걱정과 다르게 그의 특성은 차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인의 남자친구, 그리고 여행자의 위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후, 영어학원에서 만난 원어민 선생님(백인, 남아공출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선주민’이 당연히 누려온 기회를 자각하는 동시에 ‘이주민’으로서의 차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 문화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를 남자친구의 삶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음은 우리 엄마. 엄마는 저소득층이자 장애를 가진 노인이다. 어렸을 적 폭탄인지 총인지 모를 큰 소음을 듣고 난 이후, 왼쪽 청각에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엄마는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를 하고 있을 때 내가 집에 들어와도 잘 모르고 있다가 "언제 왔어!?"하고 놀란다. 또 가끔은 엄마 본인도 모르게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내서 "엄마 화났어?"라고 묻게 되는 상황도 있다. 도서관 같이 조용한 곳에 가면 “엄마 목소리좀 줄여줘.“라고 알려드려야 하고, 엄마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면 나는 늘 엄마 오른편에 앉아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생활의 어려움(기본권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이 있을 정도로 크진 않다. 병원에서도 장애인 등록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다 키운 딸이 돈은 안 벌고 공부나 하고 있어서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국가에서 가난하다고 인정해준 덕분에 엄마는 그동안 아팠던 다리 수술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거동이 불편할 예정이다. 내가 그나마 간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인간은 저마다 여러 특성이 합쳐진 고유의 정체성으로, 재미있고 반짝이는 삶을 살아 간다. 그 특성이 어느 시점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며, 그 경험은 다시 고유한 정체성(성격, 태도)을 만든다. 이 사이클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문제는 몇몇 특성들이 불평등한 경험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장애'의 경우,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하다", "대단하다", "조심해야 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사회화된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불평등한 상황, 조건을 만든다.
안타깝게도 '장애'는 인종, 성정체성, 젠더, 난민, 빈곤 등의 문제와 겹치는 경우가 많다. 이로인해 단순히 더 불평등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차별 경험이 만들어진다. (Double, multiple and simultaneous forms of oppression) 어린이 + 여성 + 이주민 + 흑인 + 성소수자 + 장애인 + ... 교차된 특성이 국가(아프리카, 남미, 유럽, 미국, 아시아)에 따라 다른 양상의 차별로 나타나는 걸 비교해 보면서, 케이스 스터디가 어디까지 다양해질 수 있는지, 장애 연구는 얼마나 더 방대할지, 나의 좁은 시야는 언제쯤 다 깨질지 몰라 짜릿했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단일한 곳에서는 이런 교차성이 '차이'라기 보다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다름이 눈에 잘 띄고 빠르게 판단되기 때문이다. 식당에 발달장애인 아들과 밥먹으러 갔다가 집단폭행으로 숨진 김창민 감독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차별도 아직까지 실재하지만, 침묵, 배제, 기회의 제한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차별은 더 깊게 뿌리박혀 있다.

부쩍 날이 따뜻해지니 달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한다.
다시 남자친구와 엄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둘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인데, 이 둘은 자신을 긍정한다. "그게 뭐 어때?" 혹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이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특성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뿐, 차별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그가 갖고 있는 인도계, 무슬림, 남아공이란 특성이 제한 또는 억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적어도 남아공에서는 경험하지 못 했을 것이다. 엄마도 역시 불평등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그 특성 또한 일시적이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자신의 특성에 대해 사회적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성이 만들어 내는 정체성을 담담하게, 혹은 기꺼이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에서 할랄 푸드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 차별를 얘기할 때 '손상'과 '장애'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손상(impairment)은 개인이 가진 신체적, 의학적 특성으로, 그리고 장애(disability)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으로 인식해야 한다. 장애학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에 따르면 손상을 '키'나 '인종'처럼 한 사람을 구성하는 수많은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단순히 손상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회활동이 어려워지고 또 기회를 얻지 못 한다면, 이 문제의 원인은 사회에 있다고 패러다임을 바꾼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평등이니까 장애인 개인에게 화살을 돌려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는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이고 사회적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다.
내가 아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장애 문제는 장애 특성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특성을 해석하는 시선, 그 시선을 전제로 설계된 정책, 그리고 그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 구조다. 어떤 특성이 개인의 삶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그 특성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그 특성을 문제로 만들고 관리하며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따라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 아니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구나 하고 관심 갖는 날이 아니다. 장애인이 '손상' 때문에 겪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목소리를 보태는 날이다. 그러니 조금 길고 복잡해 보이더라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불러야 한다.
바쁜 백수이자, 배부른 대학원생이다
Positionality
하는 일은 없는데 어째 캘린더가 빽빽하다. 4월이라 그런지 장애관련 행사가 유독 많았다. 최근 <장애학의 도전>의 저자인 김도현 선생님이 <장애학의 시선>이라는 책을 새로 펴냈다. 이를 계기로 제주노동권익센터와 제주장애인인권포럼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장애학 강의를 진행했다. 또 다른 날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울려 퍼진 안내 멘트를 듣고 참여하게 됐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작가님의 북토크였다. 유엔에서 발표한 인종차별철폐선언으로 시작해, 한국의 다문화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쉽게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에서 열린 세미나다. 미국에서 공부하시는 변재원 님이 미네소타에서 이민자 단속과 지역사회의 저항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지 전해주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5월에는 장애인원영화제가 있어서 자활단으로 신청해 놓았고, 영등포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에서 열리는 '정신장애인 마을살이'라는 행사에도 참여해 지역사회의 사례를 알아볼 예정이다. 듣고 싶은 세미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건 '백수'라서 누릴 수 있는 특혜다. 마음껏 '장애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지난 뉴스레터에 쓴 '장애에 대한 궁금증'에 답을 내려봤다. 한 달 공부했는데, 꽤나 장애학 학생다워진 것 같다. (겸손은 어려워, 으쓱)

1.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장애'가 과연 옳은가?
방금 한 말에 편견이 들어가 있진 않은가?
다른 혹은 더 나은 생각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장애' 편견 덩어리었다. 장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찰'을 밥먹듯 한다. 사회과학에는 언제나 더 나은 이론, 해석, 생각이 존재한다. 장애학은 사회복지학과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비장애인의 관점으로 어떻게 지원할까가 아니고, 장애인의 관점으로 어떻게 존재해야할까 하는 질문에 사회, 경제, 정치, 철학, 역사, 국제적으로 답을 찾는다.
2.
다른 사람들은 어떤 편견으로 장애를 생각하는가?
그 편견은 왜 그른가?
편견은 각자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형화하기 어렵다. 하나 확실한 것은 편견들이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옳지 않다. 비장애인중심주의를 영어로 'Ableism' 에이블리즘이라고 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와 다른 용어다.
3.
토마토학교에서 학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을 대신해서 결정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도움을 받는 것일까 차별을 받는 것일까?
토마토학교에서는 1주 차에 짝꿍교사와 부모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주로 아동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보호가 필요한지 등을 공유하며, 이를 바탕으로 짝꿍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한다. 토마토학교 자원활동이 처음인 선생님들은 아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부모의 의견을 전적으로 참고하게 된다. 결국 즐거운 놀이보다 안전하게 지키는 데 집중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 혹시라도 불편하거나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보호하는 역할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부모가 알려주신 아동의 특징보다, 내가 직접 관찰한 아동의 모습이 더 선명해진 것이다. 이제 반대로, 교사가 부모에게 아동의 모습을 알린다. "어머머, 전혀 몰랐어요! 토마토학교에서만 그런가봐요. 호호호."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어떤 도움이나 차별을 받는 게 아니다. 자기결정권 행사를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토마토학교를 구성하는 3요소, 짝꿍교사, 부모, 짝꿍아동은 이 지점에서 서로 조율하는 방법을 배운다. 차별인지 아닌지 성찰하는 이 질문은 사실 내가 아이들을 비장애인 중심의 시선으로, 도움과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자기결정권의 핵심 요소는 '판단'과 '소통'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소통한다.
장애학의 도전,김도현
4.
장애인은 교육해야 할 대상인가, 치료해야할 대상인가, 지원해야할 대상인가, 보호해야할 대상인가?
장애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장애'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자격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자격일까?
이 또한 비장애인중심주의적 질문이었다. '비장애인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보통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라 답할 것이다. 이렇듯 비장애인은 독자적으로 정의하지 못 한다. 장애가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다. (관계적 개념 relational concept)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중심으로 장애가 무엇인지 규범을 만들고, 그 규범 바깥에 있는 몸과 삶을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타자화한다. 그러므로 장애를 분류하는 일은 비장애인이 비장애란 무엇인지 확정해 '난 장애인이 아니야!'라고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애학 2주 차 수업에서 장애를 해석하는 여러 컨셉트를 주제로 글읅 읽고 토론했다. 정의, 공정, 자격, 평등, 능력주의 같은 사회철학적 개념이 장애와 만날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작업이었다. 진심 너무 어려워서 학업을 그만 둬야 하나 깊게 고민했다... 위의 내 질문들은 장애를 대상화하는 것, 분류하는 것, 그리고 장애의 자격을 논하는 것, 모두 '장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정의에 합의점을 찾을 순 있겠지만 정답은 없을테니, 장애학 연구는 늘상 기존의 정의를 수시로 비판하고 또 더 나은 이론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야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중도 하차하는 일이 없기를... 아멘)
5.
장애인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에 가장 만족을 느낄까?
유럽국가에서 장애인은 어떤 평등을 누릴까?
장애인의 요구가 사회에 닿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사회로부터 분명히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미등록 장애인 수가 많다는 점이다. OECD 국가의 평균 장애인 출연율은 25%다. 장애인개발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고작 5.1%에 불과한 것으로 발표됐다. (인도 2.2%, 케냐 2.2%, 남아공 15%, 프랑스 13.6%, 캐나다 22%, 파키스탄 24%) 인도와 케냐와 비슷한 수준이다. OECD 국가 중 한국만 이렇게 유독 장애인이 적을 리 없다. 다만 한국이 소수만 '장애인'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애인은 권리 요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5%에 들지 못한, 20% 가까운 사람들이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제도적으로는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 자격이 없으니 지원에서 제외된다.
영국의 경우,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외 계층의 범주를 넓게 바라본다. 무려 전체 인구의 1/5 이상이 장애를 가진 것으로 본다. 장애인 규모로 인해 연대는 좀더 활발하고, 이들의 요구 목소리는 힘을 얻는다. 게다가 단순히 장애인 수만 조사하지 않는다. '소득' '주거지' '가족형태' '인종' 등 사회적 특성도 모두 조사하여 어떤 그룹이 취약한지, 어떤 지원을 필요로 하는지, 삶의 모습이 보다 정확하게 보인다. 대상이 좁을수록 지원은 시혜가 되고, 범위가 넓어질수록 권리가 되는 법이다. 영국과 한국을 비교하면 끝도 없겠다. 하지만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서구(Anglo-Saxon) 제도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 판단하고 모방하려는 태도(모델링)다. 비교는 필요하지만, 한국에도 독자적이고 훌륭한 장애운동이 존재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장애학 연구는 '관찰'이 아니라 개입이다.
그동안 프란시스 다이어리는 내가 직접 '관찰(Observation)'한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지 느낌가는대로, 일기처럼 편하게 써왔다. 반면 이번 레터는 '성찰(Reflection)'이 주를 이룬 것 같다. 특정 주제나 이슈를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위치성(Positionality)을 자각하고, 내 주관적인 생각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보는 과정이었다. 끝내 나는 비장애인중심으로 생각하는 내가 과연 장애학을 공부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한 번은 지도교수님께 개인적인 질문을 털어놓았다. "저도 지금 제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비장애인인 제가 명확한 커리어 계획도 없이 장애학을 공부(연구)해도 되는 걸까요?" 교수님도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비장애인으로서 고민이 많았다고 하면서 하나의 논문을 소개해주셨다.
Stone, E. & Priestley, M. (1996)
Parasites, pawns and partners:
disability research and the role of non‑disabled researchers.
이 논문의 저자는 장애학 연구자가 장애라는 억압의 조건에서 객관성(objectivity)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의 위치성을 분명히 드러내 정치적으로 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애학 연구의 목적은 다른 학문과 다르게 성과에 두지 않으며, 그보다 장애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장애학 연구는 '사회 운동'의 일환인 셈이다. 연구로 부터 도출된 결과는 운동을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중요한 것은 이 결과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장애인에게 선택권을 넘겨야 한다.
이 논문은 비장애인으로서 장애학 연구를 해온 저자의 고민과 방법이 잘 담긴 글이었다. 30년 전에 쓰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진보적으로 느껴졌다.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공동체적 의존보다 주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독립을 더 높은 가치로 생각하는 한국 문화에서, 내가 수시로 듣는 얘기가 있다. "너부터 챙겨" 나의 문제 '빈곤'도 해결하지 못 하는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빈곤은 많은 장애인이 구조적으로 겪는 경험이기 때문에 나의 문제(빈곤)가 장애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이 분야를 공부해도 되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 나는 이게 장애학을 공부하는 자세라고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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