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간다며 낭만을 외치던 우쟁이, 3년 뒤 장애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현재는 무직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보고 싶어졌어요. 이제는 여행보다 공부 이야기, 낭만보다 고민, 그래도 여전히 사람 냄새 나는 일상을 적겠습니다. 파리우쟁 시즌 2라고 해둘까요. 제 영어 이름은 Frances 이고요. 2주에 한 번, 제 삶을 보내드릴게요. 만관부!
돌아온 자리에서
인생의 좋은 선택이란 무엇일까. 한국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고래(전 남친)와의 인연, 파리에서 누렸던 재즈바의 낭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던 유럽의 여유. 그 모든 것에 미련을 남긴 채 한국에 돌아왔다. 잠시 정비할 생각으로 멈춘 거였는데, 이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미련이 계속되면, 집착이 되는 법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획은 자꾸만 바뀌었고, 정신 상태도 요동쳤다.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고래와의 연락도 점점 옅어지더니 결국 끊어져버렸다. 한편 '봉쥬흐~' 프랑스어 감각을 유지하고자 종로에 있는 프랑스 어학원에 등록했지만 공부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내게 당장 필요한 건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는 나의 뇌를 잠깐 스쳐갈 뿐이었다.
실패는 괜찮다. 부끄럽지도, 후회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삐그덕거리는 일기장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닥치고, 영어공부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해지기만 한다. 당장 대학원에 지원서를 넣으려면 영어 성적이 필요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게 4월이니까, 그해 9월, 토플을 두 번 봤다. '2회 응시 할인'에 넘어가 요령을 부렸다. '첫 시험은 Reading과 Listening만 집중해 공부하고, 두 번째 시험은 Writing과 Speaking만 하면 되겠지'하고. 당연히 모든 과목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다. 항목별로 20점만 넘기면 되는데 두 번째 시험에서 라이팅 2점이 부족했다... 그래도 11월, 시간이 없었다. 급히 원서를 넣었다. '2점인데, 설마 안 되겠어?' 두 달을 기다린 결과, '영어 성적 미충족'.
내가 지원하는 대학원은 1년에 두 번 지원을 받는다. 나야 다시 지원하면 되는 일이지만, 추천서를 써주신 두 분께 너무 죄송했다.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고민끝에 장문의 편지를 썼다.
도와주는 두 분에게 합격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매일같이 영어에 몰두했지만, 오히려 커트라인에서 멀어져갔다. 아쉽게도, 토나올 정도로 영어만 공부했음에도, 학원을 다녔음에 불구하고, 점수는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떨어지기만 했다. 길은 잃은 듯 했다.


그때 다시 나의 희망이 되어준 것이 있었으니, 토플의 'Best Score' 제도였다. 한 번도 모든 과목을 동시에 넘긴 적은 없었지만, 최고 점수들만 모으면 지원 가능한 성적표가 나왔다. 그래서 이걸로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원서를 접수했다.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이번에는 문의 메일도 보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응, 베스트 스코어 안 돼." 이제 포기를 해야 할 차례였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더는 돈을 쓰고 싶지도,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나에게 너무 과한 도전이었다.

닥치고, 돈 벌기
주기적으로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일을 병행했다. 그 사이에 마이너스 통장을 살렸고, 학비를 조금 모았다. 중고차를 되팔았고, 런던에도 잠시 다녀왔다. 편도가 25만 원이라 안 갈 수 없었다. 다만 돌아오는 환승 비행기를 놓쳐 예상치 않게 마드리드까지 겸사겸사 여행했다. 그후로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공허하기만 했다.

어느 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면접을 봤다. 팀장 자리였다. 중요한 건 기세라고 생각하고, 영어 면접까지 호기롭게 마쳤다. 면접관님은 왜 다큐멘터리를 그만두었냐고 물었다. 45분 동안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영화와 다큐멘터리에 대해 얘기했고, 그렇게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곧장 집에 돌아가지 못 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두 시간을 잤다. 며칠 뒤 면접 결과는 떨어졌다.
또 다른 날, 자정을 조금 넘겨 쿠팡 물류센터로 운전해 갔다. 거리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고, 쿠팡이라고 쓰인 간판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천과 부천 사이 어딘가 위치한 거대한 이 건물은 거대한 우주정거장같았다. 꼭대기까지 나선형으로 빙빙 올라가 주차를 하고, 집합 장소를 찾느라 한참 헤맸다. 그곳에서 형광색이지만 때가 뭍어 누렇게 바랜 조끼를 건네받았다. 짧게 안전 유의사항을 들은 뒤 분주하게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곳곳에 촬영금지라는 안내가 보였다.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가 싶었다. 배정받은 벨트 앞에서, 아침 8시 30분까지 물건을 분류했다. 중간 30분을 쉬었고, 다섯 시간 가까이 물건을 나누고, 쌓고, 보냈다. 어지러웠다. 다음 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발 위로 떨어진 박스 때문에 엄지발가락이 아파왔다. 멍이 들었지만, 그 뒤로도 10만 원을 더 준다고 해서 3일을 더 나가 일했다.
또 다른 날, 친구가 출판사를 열 건데 같이 하자고 했다. COO라는 직책이 꽤나 멋있었고, 페이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껏 받은 페이 중 가장 높았다. 새로운 일에 뛰어들기 좋아하는 스타일이기에 내 회사처럼 열정을 쏟았다. 두 달 동안 사업자 두 개를 냈고, 책을 한 권 출판했으며, 직원은 5명으로 늘었다. 예쁜 로고가 인상적인 명함도 만들었지만, 재정난으로 회사는 끝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쓴 소리
토마토학교 뒷풀이에서 나의 절친들이 하나씩 충고를 전했다. "너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나중에 40대 되어서 힘들어진다!" 이 무슨 저주인가. "10년 전 20대일 때부터 누나 자존감이 좀 낮은 거 같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쓴소리 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나를 더 깎아내리고 싶었다. "맞아, 나는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해왔어. 잘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다시 그들은 내게 말했다. "야, 그 도움들 다 니가 한 거야. 도와주는 사람들도 아무나 고르지 않아. 너라서 골라준 거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답답한 건 내 인생인데, 자기 일인 것처럼 얘기해주는 토마토 사람들이 고마웠다. 22살의 어린 시절부터 쭉 나를 봐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쓴 소리였다.
30 years ago, I had a producer tell me that I was a popcorn actress and at that time, I made that mean this wasn't something I was allowed to have that I could do movies that were successful that made a lot of money but that I couldn't be acknowledged. I bought in and believed that. That corroded me over time to the point where I thought a few years ago that maybe this was it. Maybe I was complete maybe I was done what I was supposed to do. I'll just leave you with one thing that I think this moive is imparting is in those moments when we don't think we're smart enough or pretty enough or skinny enough or successful enough or basically not enough. I had a women say to me Just now, you will never be enough. But you can know the value of your worth. If you just put down the measuring stick. So today, I celebrate this as a marker of my wholeness and for the love that is driving me and for the gift of doing something I love and for being reminded that I do belong.
30년 전, 한 프로듀서가 나에게 내가 ‘팝콘 배우(popcorn actress)’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나는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버는 영화에는 출연할 수 있지만, 정작 인정받을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버렸다. 그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조금씩 좀먹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게 끝인가? 나는 이미 다 이룬 건가?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난 건가?” 하고. 이 영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 한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우리가 스스로 충분히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성공적이지도 않다고 느끼는 순간들, 결국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그 순간들에 대해서다. 방금 전 한 여성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절대 충분해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알 수 있다. 단지, 그 비교의 자를 내려놓기만 한다면. 그래서 오늘 나는 이 순간을 나의 온전함(wholeness)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기념한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선물을 위해,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Michelle Yeoh, 2023 Academy Awards acceptance speech
나는 자존감도 낮고,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항상 도움을 받아왔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덕분에 가늘고 길게 버티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이런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스스로 박수를 쳐주는 것이다.
한동안의 휴식기를 거친 뒤, '올해가 마지막이다' 그리고 '될 때까지 한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다만, 이제 토플 시험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유 모를 긴장감이 들기 때문에, TOFEL 대신 IELTS를 택했다. 토플만 떠올리면 ‘이번에도 안 될 거야’라는 생각에 휩싸일 것 같았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IELTS 책과 강의를 구입해 매일 도서관을 다녔다.



Everyone seems to have a clear idea of how other people should lead their lives, but none about his or her own. ... It's what you have always wanted to accomplish. Everyone, when they are young, knows what their Personal Legend is. At that point in their lives, everything is clear and everything is possible. They are not afraid to dream, and to yearn for everything they would like to see happen to them in their lives. But, as time passes, a mysterious force begins to convince them that it will be impossible for them to realize their Personal Legend. ... It's a force that appears to be negative, but actually shows you how to realize your Personal Legend. It prepared your spirit and your will, because there is one great truth on this planet: whoever you are, or whatever it is that you do, when you really want something, it's because that desire originated in the soul of the universe. It's your mission on earth. ... The Soul of the World is nourished by people's happiness. And also by unhappiness, envy, and jealousy. To realize one's destiny is a person's only real obligation. All things are one. ... And when you want something, all the universe conspires in helping you to achieve it.
그것은 네가 언제나 이루고 싶어 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릴 때는 자신의 ‘개인적인 전설(Personal Legend)’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인다. 사람들은 꿈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갈망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신비로운 힘이 나타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 힘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네가 어떻게 하면 너의 ‘개인적인 전설’을 실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너의 영혼과 의지를 단련시킨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의 위대한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누구이든, 무슨 일을 하든, 네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 바람이 우주의 영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네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다. 세계의 영혼(Soul of the World)은 사람들의 행복으로 자양분을 얻는다. 그리고 불행, 질투, 시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양분을 얻는다.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한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짜 의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네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할 때, 온 우주가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The Alchemist, Paulo Coelho
영어 성적을 만드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마지막 시험 마저도 운이 좋았다. 다 틀린 거 같아서 '망했어!' 하며 술을 퍼마셨건만 전혀 예상 못 했다. 여전히 영어는 나에게 외국어라서, 너무 어렵다. 그치만 이제야 한 발을 디딘 것 같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장하다. 우쭈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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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ni
ㅎㅎ한국에서의 삶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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