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양해 말씀: 이 글은 매우 긴 글입니다.
이선균 배우의 마약 복용의 과거가 폭로되는 과정의 자살에 대해 지난 주에 마약에 대한 우리사회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지적한 바가 있었다. 하나는 마약의 소비를 과연 범죄화하여 모두 금지 일변도와 형사처벌 위주의 접근이 자유의 철학적 관점에서 타당하고, 마약의 통제의 관점에서 실용적이고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다. 두번째는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마약 사용이나 도박과 같은 행위에 대해 법적 책임을 넘는 사회적 처벌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두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댓글을 통한 반론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약이 자유를 천부적 권리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피해자가 없는 자유로운 선택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타당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예상대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그 반론의 핵심은 마약의 피해가 얼마나 큰데 그것을 자유의 범주로 인정하는 것을 근거로 한다. 정신을 못 차리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청년의 예를 든 분도 있고, 당신의 자식이 그것을 해도 이런 주장을 하느냐는 감정적 반론도 있었다.
물론 나는 마약의 위험을 잘 알고 있고, 내 자식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의 주장을 한 것이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또는 선생이 자식과 제자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일까?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사회가 모든 국민의 행위와 가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미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는 설자리가 없고,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현실적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약이라는 단어가 이미 의미하고 있고 수많은 폐해가 잘 알려져 있는데 왜 마약이 자유의 범주에 속해야 한다고 나와 많은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고, 마약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선균 배우의 자진에 즈음한 시사적 칼럼이다 보니 나의 설명은 지나치게 압축적이었던 것 같다. 먼저 독자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주장이 극단적 자유주의자 이병태 교수만의 견해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소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보수적 한국 사회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서구의 많은 학자나 사상가들, 그리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보건 전문가들은 내가 주장한 견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마약”이라는 한 단어로 문제를 단순화하면 이슈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힘들다. 마약과 향정신성 물질의 경계는 모호하다. 향정신성이 있고 중독성이 있으며, 신체와 정신적 건강 상의 부작용, 생산적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에 지장을 많이 주는 물질들을 우리는 마약으로 지정하고 그 소비가 특정하게 예외적이지 않으면 소비와 유통을 금하며 불법적 물질로 마약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경계는 자의적이다. 과거 마약으로 금지되고 처벌받았던 마리화나는 유럽은 오래 전부터, 그리고 미국은 최근 많은 주에서 합법화되었다. 나는 박사과정 공부를 미국에 도착했을 때 영어 공부를 할 겸 토론 클럽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토론의 주제 중 하나가 마리화나 합법화에 관한 찬반 토론이었다.
당시 한국의 마약에 보수적 견해를 간직하고 있던 나는 이 주제가 ‘어떻게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하는 불편한 심정이었다. 충격은 토론회 장에서 더 크게 다가왔다. 토론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마리화나 피워본 사람들 손들어 보라고 하자 미국의 참가자 대부분은 남녀를 불구하고 손을 들었다.
마리화나에 대한 미국 사회의 변화된 인식은 그 해 진행된 미국의 대선에서 더 분명해졌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마리화나의 경험을 묻자 피워는 봤는데 깊이 들이마시지는 않았다 (didn’t inhale)라고 대답했다. 언론들은 이것이 그의 대선에 악영향으로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석하면서 60년데 반전 운동 이후의 세대들이 히피 문화와 함께 마리화나를 피웠고 그 세대는 그것을 안 한 척하는 것이 위선적이고 문제 삼는 게 이상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의 정치인들은 마리화나의 사용 과거를 숨기지 않고 있다. 2003년 미국의 민주당 대선 예비 선거 운동 과정에 유력 후보자 John Kerry, John Edwards, Howard Dean 모두 과거 마리화나를 피운 과거가 있다는 고백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마리화나나 환각 버섯과 같은 향정신성 물질의 소비가 다른 더 위험한 마약의 중독으로 이끄는 입문 마약(Gateway Drug)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들도 있다).
마약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를 논의 하려면 왜 우리는 술, 담배, 커피와 건강에 해롭다고 의료계에서 말하는 물질들을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해서 마약의 범주에 두지 않고 소비자의 자유의 영역에 두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전의 글에서 내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개별 선택에 대해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었다. 내 마약의 형사처벌 반대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분들은 그 해가 크니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자유를 오해하고 있다.
자유가 있다고 사회가 모든 것을 방임하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권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반듯이 옳은 선택은 아니다. 사람이 많은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외칠 자유(권리)가 있는가? 우리의 직관적 판단과는 달리 그 자유와 권리는 있다. 그리고 있어야 한다. 정말 불이 났을 경우에 누군가는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 자유(권리)가 불이 없는데도 외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최근에 이재명 대표에게 테러를 가한 피의자의 정당 가입 여부를 경찰이 발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또한 그를 처리한 서울대 병원의 주치의가 상태의 브리핑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었다. 문제는 수사 중에 알게 된 개인의 정당 가입의 여부를 공표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료 정보도 동의없이 발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선의의 의도로 이런 무차별적인 금지 규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개인의 사생활 보호, 정당의 정치적 자유의 보호의 가치 이외에도 사회에는 많은 가치들이 있는데 무차별 금지가 이런 충돌하는 가치를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무차별 법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을 대체적으로 불온하게 보는 시각의 법들이다.
우리가 술 담배 등에 대해 의학계의 부정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허용하고 자유의 범주에 두는 일도 전통적으로 허용되었기에 허용하는 문화적 이유만은 아니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흡연자들은 격무나 긴장의 시간 이후에 담배를 찾는다. 흡연의 부작용과 흡연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감소의 긍정적 효과 중에 개인별로 어느 것이 더 좋은 기능인지 우리는 함부로 판단하기 힘들다. 니코틴 중독에 관한 유전적 형질이 다 다르고, 개인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애연가로 살아도 100세 넘게 장수한다.
술의 부정적 효과도 수없이 많지만,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인연을 만들고, 가슴을 트고, 사랑을 찾고, 사업을 도모하고, 일부는 잠이 오지 않을 때 수면을 위해 알코올을 소비한다. 소위 Night Cap이다. 그것이 플라시보 효과든 아니든 사람들은 한 잔의 술이 잠이 들게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담배와 술의 금지하여, 개인의 유전적 형질과 사회 경제적 처지를 무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게 하고, 불면의 피해를 늘게 하는 것이 정의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인간의 유전적 형질과 삶의 양태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한가지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최소화하는 것이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인 것을 선택하게 허용하는 주요한 이유다.
이때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Night Cap으로 술을 소비하는 것의 자유를 준다고 우리가 술을 권장하거나 규제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 중에 술이 건강에 나쁠 수 있으니까 이슬람 국가들처럼 금주를 전국민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음주 운전의 처벌과 같이 수많은 규제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다른 물질(마약이라고 임의로 분류한 것)들은 자의적으로 전면 금지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자유(권리)를 허용하는 것과 그것이 무한대로 사회가 권장하고 방임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음주 운전을 단속하고, 알코올 중독의 위험과 건강 상의 위험을 사회가 끊임없이 알리면서 개인들이 위험한 선택으로 치닫지 않게 한다. 금지 일변도가 위험한 이유는 대학 신입생들의 알코올에 의한 사고에서 명확이 나타난다. 청소년의 알코올 소비가 금지된 미국의 대학 신입생들이 갑작스러운 음주 사고로 사망이 많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런 일이 많지 않다. 유럽에서 와인은 식사의 일부로 어릴 적부터 마셔왔기에 금지된 물질에서 돌연 자유를 얻은 미국의 대학생들과 경우와 다른 것이다. 담배의 소비 자유는 성인들에게 주어져 있지만 흡연의 건강상의 해를 지속적으로 홍보한 덕택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흡연인구는 급격하게 줄어 왔다.
즉 자유가 있다는 것이 그것의 소비와 선택을 권장하고 늘리는 것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어떤 물질이든 독이 되는 사람이 있고 특정한 경우에 약이 되는 경우도 있기에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들에게 선택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제도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전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분들이 이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자유라는 말이 자유 방임이고 사회적 권장으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마리화나나 환각버섯 (Psychedelic mushroom)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측이 내세우는 긍정적 효과도 많이 있다. 정신적 스트레스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덜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들고 있다. 환각 버섯에 대한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연구는 버섯의 사용이 현재 널리 사용되는 우울증 치료제에 뒤지지 않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마약을 특정한 경우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성적인 참기 어려운 통증을 갖고 있거나, 참기 어려운 고통이 수반되는 말기 암이나 신경 관련 질병의 환자들이 마약을 통해 통증으로부터 고통을 덜 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은 어떠한가? 담배와 술을 스트레스 때문에 소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마약이 이러한 효과는 앞서 설명한대로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경우가 연구되어 왔다. 마약(향정신성 물질)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처벌하자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마약에 의한 죽음을 줄일 수 있으며 국가가 개인들을 마약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나 질병 상태의 사람들이 마리화나나 환각 버섯과 같은 것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더 고통받고 절망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이러한 약물의 통제와 규제가 원천 금지되어 있지만 과연 한국이 절망의 죽음이 다른 나라보다 적은가? 한국의 OECD 1위의 자살율은 향정신성 물질을 모두 불법적인 마약으로 금지하는 것과 무관한 것인가? 왜 그런 물질들이 합법적인 유럽 국가의 나라들에 비해 우리의 자살은 유난히 높은가?
연구가 없기 때문에 정신의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물질과 자살율의 관계를 나는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잘 알려진 것은 좋은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같이 살피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향정신성 물질의 중독이나 건강상의 이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 금지가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지 살리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의 코로나에 대한 지나친 정부의 강경한 대처가 코로나 사망자는 줄일 수 있어도 사람들의 다른 질병에 관한 치료 기회의 박탈과 정신적 충격으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예년보다 높은 초과 사망자들을 양산하는 경우와 유사한다. 돌이켜보면 치사율도 낮은 코로나에 의한 사망자를 최소화하는 강경 정책들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다른 질병의 사망을 늘린 것을 현명했다고 우리가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중독성이 낮은 마리화나의 금지가 더 중독성이 있고, 후두암, 폐암과 같은 질병의 원인으로 잘 알려진 담배의 소비를 늘리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는가? 많은 규제들은 사람들에게 대안을 모색하게 하고 때로는 그 대안이 더 위험한 경우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미국의 9/11 테러 이후의 강화된 항공기 탑승시 보안 검색의 규제다. 비행기 타는 것을 어렵게 한 것이 훨씬 사고의 위험이 높은 자동차 여행을 대안으로 채택하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우리가 획일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인간들의 다양성에 대한 배려이다. 흑백의 이분법적으로 무조건 좋고 나쁜 것들은 세상에 잘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자유이다. 하지만 자유(권리)가 어떤 선택을 권장하거나 증가시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가 구분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질문은 금지가 마약 사용을 막고 소비를 줄이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마약의 소비에 대한 형사적 처벌에 의문을 품을 때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마약의 소비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미 담배에서 보았듯이 담배는 자유의 영역에 있지만 그 유해성을 꾸준히 알리고 사회적 교육을 시킨 이후로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어 왔다. 술의 소비도 그러한 추세를 따른다. 즉 어떤 소비와 선택을 줄이는 방법이 금지만은 아니다.
마약의 비범죄화의 긍정적 효과는 포르투갈의 실험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포르투갈은 2002년에 마약 사용의 범죄화를 철폐했다. 이것은 마리화나나 환각 버섯과 같이 해가 적다는 약물들만이 아니라 코카인(Crack,) 헤로인 등과 같은 모든 약물에 대해 형사처벌 제도를 철폐했다. 물론 이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에 반대하는 쪽은 마약 사용이 급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형사범죄화 대신 벌금으로 대체할 때 포르투갈은 10만명 이상이 헤로인을 사용하는 큰 사회문제를 갖고 있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약물을 남용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독립적인 연구 조사에 의하면 약물을 주기적으로 소비하는 수는 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약물의 중독자는 거꾸로 감소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더 좋은 소식은 10대 청소년들의 마약 사용이 줄었다는 것이다. 금지는 청소년들에게 호기심을 부른다.
비범죄화가 가져온 변화는 길거리의 폭력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마약을 사기 위한 강도 짓도 줄었고, 마약의 사용자와 경찰의 충돌에 의한 사망도 당연히 없어졌다. (참고 자료: What America Can Learn From Portugal's Drug War Reforms, JOHN STOSSEL, Reason.com)
우리가 어떤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많은 것들을 선택하지 않고 배척한다. 우리가 어떤 소비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선택에 비해 나의 효용을 가장 크게 한다고 믿기에 (대부분은 나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소비한다. 그래서 술과 담배, 도박과 같은 많은 재화와 서비스의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소비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마약을 소비하지 않는 것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비하지 않는 것이지 금지되어 있어서 소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정용 소비를 위한 술의 제조 (대부분 막걸리)가 불법이고 단속의 대상인 적이 있다. 그 제도는 철폐되었다. 그것이 술의 제조와 소비를 늘렸는가? 아니다. 그런 자유가 있다고 지금 집마다 집안에서 막걸리를 제조하지 않는다.
사실은 역사적으로 획일적 금지가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우리나라는 통계가 잘 없지만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은 처참한 실패의 역사다.
미국의 마약과의 규제의 역사는 18-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적으로 “마약과의 전쟁” (War on Drugs)이 선포된 것은 1971년 닉슨 대통령에 의해서다. 최근 미국의 연방정부와 지방정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마약 단속에 들어가는 연간 예산은 최소 667억불 (약 87조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마약과의 전쟁이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는 마약관련 위반으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의 수에서 명확하다. 아래 그래프는 마약과의 전쟁이 본격적 선언된 초기인 1980년과 2019년 마약관련 범죄로 형기를 살고 있는 수감자의 수를 보여준다. 1980년에 17,200명에서 2019년 181,422명으로 10.5배나 증가했다. 2020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116만명 마약의 제조, 유통, 소지로 체포된다. 미국의 체포의 26%가 마약 관련 체포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국 감옥을 자유 세계에서 재소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만드는 첫번째 원인이 마약 단속이다.
그림 2는 정부의 강경 정책에도 불구하고 마약 관련 범죄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마약의 단속의 성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래 그림 3은 마약의 소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국의 절망의 죽음 (자살, 음주 및 마약 관련 중독사)에서 다른 절망의 죽음은 줄어들거나 큰 변화가 없는 대신에 마약에 의한 사망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대중들은 지금도 마약 사용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마약 단속의 실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마약과의 전쟁은 늘 대중의 지지를 받고 정치인들은 그것을 공약한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법무 장관일 때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도 이러한 대중의 지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마약 소비자들은 정부의 강경 정책과 범죄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법을 지키고 소비를 단념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Lisa McGirr의 저서 “알코올과의 전쟁: 금주법과 국가주의의 부상” (The War on Alcohol: Prohibition and the Rise of the American State)은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The Great Society)와 함께, 1920년대의 금주령(Prohibition)이 미국의 국가의 급속한 팽창을 가져온 초당적 정책 유산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피해자 없는 선택을 범죄화하는 순간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금지선은 무너지는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한 금주령의 시도와 하나도 다르지 않는 정책임을 이 책은 주장하고 있고 금주령의 실패한 역사적 교훈을 전혀 배우지 않고 정부의 강압적 통치만 강화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이 범죄화는 압도적으로 흑인들에게만 불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자주 사회적 논란이 된다. 마약의 소비가 있기에 유통과 생산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비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와 같은 특권층들이 흔히 포함된다. 최근 머스크의 마약 사용의 문제를 다룬 월스트리트 저널은 머스크가 참가자들에게 비밀 유지의 서약을 받고 휴대폰 휴대를 금지한 채로 은밀한 마약 파티를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고 운반하는 흑인들은 공권력의 주요 타겟이 되고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범법자가 되고 이 단속 과정에 양 쪽의 동원된다. 맨허튼 연구소(the Manhattan Institute)의 선임 연구원 John McWhorter은 금지와 규제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편중되게 적용되어 왔고, 마약과의 전쟁이 흑인들을 파괴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destroying black America").
왜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하는가? 아무리 법이 강화되어도 마약을 소비하겠다는 소비가 있는 한 공급이 유지된다. 그리고 그 어떤 산업보다 마약의 산업은 혁신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과거에 아편과 코케인이 천연의 한 가지 재료로 추출하는 반면 지금의 마약들은 끊임없이 다른 합법적 약품 들을 복합적으로 조합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어 낸다. 감기약, 진통제, 동물 마취제, 진정제 등을 배합해서 훨씬 독한 새로운 마약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Fentanyl (팬타닐), tranq, “super meth”, “polysubstance” (복합물질)의 새로운 마약들이 제조된다.
카토(Cato) 연구소의 연구 위원이자 애리조나의 의사인 Jeffery Singer는 "마약의 단속 법의 역설은 법이 강해질수록 마약의 더 강력해진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A라는 물질이 마약으로 유행하면 그것을 물질을 불법 마약으로 지정하고 단속이 강화되면 마약의 생산 공급자들은 더 강력한 마약 B를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 B를 단속하면 새로운 유행 C가 탄생한다. 이들 새로운 마약의 대부분은 합법적인 약품들을 조합하고 가공해서 만들어진다. 이 숨바꼭질은 공권력이 늘 실패한다는 것이다. (참조 Reason.com Prohibition Gave Us Tranq-Laced Fentanyl, Mixing other drugs with xylazine is driven by the economics of prohibition, JACOB SULLUM , AUGUST/SEPTEMBER 2023 ISSUE)
금주령은 알 카포네를 탄생시켰다. 즉 술의 범죄 사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금주령을 위반하는 고위험 사업은 거대한 조직 범죄 집단을 만들어 내고 그 사업권의 영역 다툼과 단속의 과정에 많은 폭력(violence)를 동반했다. 그리고 범죄 집단들은 단속을 피하고 의심 받지 않은 유통망을 찾는다.
이때 자주 마약 범죄 조직이 목표로 삼는 대상이 불행한 가정의 어린 아이들이다. 마약 단속을 하는 전문가들은 ‘마약 범죄 갱들의 어린이 채용의 능력은 포춘 500대 기업들의 인력 채용의 능력보다 뛰어나다. 그들은 애들을 어떻게 꼬실 줄 안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마약의 사용이 자유화하면 더 많은 청소년들이 마약 갱들에 의해 고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반대다. 금주령 때에도 지금의 마약의 경우처럼 술의 생산과 유통이 범죄 사업이 되었고 청소년들이 단속을 피해서 활용되었다. 지금 길거리에서 “저기요, 제가 잭 다니엘이 있는데요”라고 길가는 고객들을 유혹하는 어린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주령이 폐지된 1933년 이전에는 술의 유통에 동원된 많은 청소년들이 있었고 종종 폭력이 난무했다. 이것이 합법으로 되었을 때 이런 지하경제와 폭력집단은 사라졌다. 우리가 상점에서 술을 합법적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살 수 있는데 길거리 술 암거래 유통이 지속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마약의 형사적 처벌의 종식을 주장하며 간단히 설명했지만, 그렇다면 사회는 마약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 마리화나 또는 환각성 버섯처럼 부작용이 술과 담배와 같은 이미 합법화된 향정신성 물질들과 유사한 물질들 (특히 중독성이 약한 물질들)에 대해서는 완전 자유화를 꺼릴 이유나 명분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을 한 바 있다.
그럼 다 강한 마약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과의 무모한 전쟁을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방안은 처방약처럼 하자고 하는 것이다. 의사들의 처방전 하에서 마약을 합법적으로 하게 되면 지하 경제화된 범죄조직들이 더 위험하고 더 강한 마약으로 유혹하는 대신, 의료진들이 관찰과 조언, 그리고 필요시에 응급 조치를 하면서 소비하게 하면 위험한 마약으로 이전하거나, 과한 용량의 복용으로 인한 죽음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절망의 죽음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약물의 오남용에 의한 죽음은 본인들이 자실을 하려고 약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모르고 과한 용량을 복용하여 (over-dose)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오피오이드 등 과용량의 복용의 응급시에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약들이 개발되어 있지만 숨어서 약물을 혼자 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구하는 약물과 응급 조치의 조력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절망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만약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공식의료에 편입시킬 경우, 의료계는 약물의 처방뿐만 아니라, 약물 소비에 이르게 된 심리적 문제와 다른 행동 치료 등을 권할 수도 있고, 마약을 찾게 만든 근원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서비스, 명상과 간은 마약의 대안적 해법들에 대한 교육과 안내를 통해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범죄 집단의 수익이 되었던 약물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세수는 마약퇴치와 마약 소비자와 그로 인해 경제적 곤경에 처하게 되는 가족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접근 방식이 마약으로부터 더 자유롭고, 마약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는 사회가 실험을 통해 입증할 문제이지만 현재의 금지와 처벌의 방법이 문제 해결에 무력하고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고 폭력적 사회를 만들고 있으며, 정부와 공권력의 비대화를 가속화하여 자유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은 별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가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마약의 형사 처벌의 종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약이 무섭지가 않다고 생가해서가 아니라 마약이 무섭고 위험한 것이라서 다른 접근법을 주장한다고 하는 점이다. 형사 처벌화는 그 위험한 것을 음습한 지하로 숨게 하고, 형사처벌의 중단은 햇볕 아래 드러나게 해서, 범죄 집단의 사업을 종식시키고, 사회가 함께 마약으로 피폐화해지는 개인들이 마약의 문제를 극복하고 극단적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마약의 문제를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 보수주의의 바탕에는 현실의 질서를 인정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취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데오르기나 종교적 신념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디자인하겠다는 것은 사회주의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는 선택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허용되어야 하고, 다수가 문화적 독재를 통해 개인을 억압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믿는다. 이런 개인의 선택은 다수가 잘못된 길이라고 믿는 길도 개인들이 갈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 즉 다시 말해 자유란 개인이 자신이 선택한다면 다수가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과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선택도 포함된다. 인생에서 무엇이 올바른 삶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근거와 확신이 어디에 그리 강하게 있는가?
나는 마약 소지만 해도 사형을 시키는 중국이나 술을 먹으면 지옥에 가는 듯이 믿는 무슬람 국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나라들이 더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P.S [1] 혜우(정현목)님, Noname Chris님이 커피 선물로 응원의 뜻을 전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성원해주신 커피 응원은 제가 현금화하지 않고 있으며 금액이 어느 정도 커지면 보람 있는 일에 구독자분들의 뜻을 담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과 커피 성원 모두 제게는 벅찬 성원입니다.
[2] 저는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 그리고 멕시코의 캔쿤으로 처와 함께 휴가를 위해 이동 중에 있습니다. 저와 처가 공부를 하고 미국 생활을 시작한 텍사스 오스틴에 계시는 오선문님 부부의 후의로 추억의 시간을 보내고, 지금은 캔쿤을 가기 위해 휴스턴 공항에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5시간 지연되더니, 오늘은 휴스턴 공항에서 7시간 넘게 지연되고 있습니다. 상고대가 달린 나무들과 눈발이 날리는 도로를 운전하는 텍사스 남부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광경을 보며 왔습니다. 이런 휴가로 인해 뉴스레터를 자주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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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욱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교수님의 열정에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행복한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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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이
좋은 글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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