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를 받으면 회사가 성장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반대다. 성장할 준비가 된 회사가 투자를 받는다. 이 순서가 바뀌면 돈은 들어왔는데 방향은 흐려지고, 쓸수록 불안해진다.
그런데 고민은 단순하지 않다. 주변 대표들이 투자 소식을 알릴 때마다 조급해지고 막상 투자자를 만나면 우리 회사의 숫자가 작아 보인다. 받자니 잃는 것이 눈에 밟히고 안 받자니 놓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IR을 고민할 때 대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을 모았다.
투자를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할까? 필요할 때 받아야 할까?
받을 수 있을 때 받는 게 맞다. 다만 이 말이 위험한 이유가 있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취해서 왜 받는지를 잊기 쉽다. 투자금은 도구다. 도구는 쓸 곳이 분명할 때 의미가 있다.
쓸 곳이 분명하다는 건 어떤 상태인가?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그 결과 어떤 숫자가 바뀌는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일단 받아놓고 생각하자는 분명한 게 아니다. 예로 C레벨 1명과 실장급 2명 채용하고 6개월 안에 GMV를 지금의 3배로 만든다.
근데 현실적으로 투자 유치에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돈이 필요해질 때 시작하면 늦지 않나?
늦다. 그래서 타이밍의 문제가 생긴다. 런웨이가 6개월 남았을 때 투자 유치를 시작하면 이미 협상력을 잃은 거다. 급한 쪽이 양보한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결국 여유 있을 때 받으라는 말 아닌가?
맞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대표가 실수한다. 여유 있을 때 받되, 여유를 유지하는 데 쓰면 안 된다. 투자금으로 현상 유지를 하면 돈은 줄고 회사는 그대로다. 투자는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써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조금 더 오래 하는 데 쓰는 게 아니다.
얼마나 받아야 하나?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만큼이다. 다음 라운드까지 도달하려면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고, 그걸 해내는 데 드는 비용을 역산하면 금액이 나온다. 많이 받을수록 좋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금액이 크면 밸류에이션도 높아지고 다음 라운드에서 그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해야 하는 부담도 따라온다.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지금은 좋다. 나중이 문제다. 밸류에이션은 약속이다. 이 회사가 그만한 가치로 성장하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다음 라운드에서 다운라운드가 된다. 다운라운드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기존 투자자, 임직원, 회사가 흔들린다. 다운이 한번 되면 생각보다 여파가 크다. 적정한 밸류에이션은 지금 약간 아쉬운 수준이다. 그래야 다음에 올라갈 여지가 생긴다.
투자 안 받고 버틸 수 있으면 안 받는 게 낫지 않나?
버틸 수 있다는 것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매출로 운영비를 감당하면서 원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면 투자를 받을 이유가 없다. 그게 가장 좋은 상태다. 하지만 속도를 높여야 하는 시점이 있다. 시장이 열려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자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자기 돈만으로 충분한 회사는 드물다.
투자받으면 대표가 잃는 것도 있지 않나?
있다. 시간, 지분, 의사결정의 자유. 이 셋 중 대표들이 가장 과소평가하는 건 시간이다. 투자 유치에는 보통 3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대표의 관심은 제품과 고객이 아니라 투자자에게 간다. 회사가 가장 잘 돌아가야 할 시기에 대표가 자리를 비우는 셈이다.
투자를 받고 나면 대표의 역할이 달라지나?
달라진다. 투자 전에는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투자 후에는 설명하는 사람이 된다. 이사회, 투자자 미팅, 월간/분기 리포트. 누군가에게 회사의 상태를 보고해야 하는 시간이 생긴다. 이게 나쁜 건 아니다. 설명하려면 정리해야 하고, 정리하면 못 보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시간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아야 한다. 제품을 만들던 시간, 고객을 만나던 시간에서 온다.
투자를 거절해도 되나?
된다. 오히려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조건이 맞지 않는 투자를 받으면 돈은 들어오지만 회사의 방향이 흔들린다. 특히 투자자가 원하는 방향과 대표가 원하는 방향이 다를 때, 그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텀시트를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서 받아들이는 대표도 있다. 하지만 투자는 거래다. 양쪽 다 선택하는 것.
지금 받는 게 맞는지 결국 어떻게 판단하나?
세 가지를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 건지 말할 수 있는가. 그 일을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는가. 이 조건으로 받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셋 다 명확하면 받으면 된다. 하나라도 흐리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낫다. 투자는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확신의 문제다. 남의 돈을 쓰겠다는 결정에는 그 정도의 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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