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동네의 3km 내외를 벗어나지 않고 지냈다. 나름대로 토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유년 시절의 또렷한 기억은 공릉동의 어느 주택 2층에서 시작된다. 집주인이 사는 1층 마당 한 편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있었고, 나는 돌계단 층계에 돗자리를 펴놓고 옆집 머시매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그 집은 창이 크고 거실이 넓어서 엄마가 직접 만든 노란 커튼이 참 근사하게 어울렸던 게 떠오른다.
집주인은 친절하고 웃음이 많은 여자분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작은 텃밭에 수박씨 두 알을 심는 것도 웃으며 내버려두었다. 얼마 후, 유치원에 다녀온 나는 그 자리에 지지대를 칭칭 묶은 고추 줄기가 생겨난 것을 발견했다. 잔뜩 신나서 수박씨를 심은 자리에서 고추가 자랐다고 집주인에게 자랑하자 그는 다른 말 없이 신기한 일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들뜬 어린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그의 다정은 참 싱그럽고 부드럽지 않은가, 비로소 생각하곤 한다.
성인이 되어서 옛집 근처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내 기억과는 달리 동네는 무척이나 아담했다. 심부름하러 가기 위해 열심히 올랐던 언덕은 좁고 야트막했고, 대문 너머로 넘겨본 집은 역시 삭막하고 조붓해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수박도 고추도 키우지 않는 것 같은 회색빛 집을 지나치며, 물약을 먹은 앨리스처럼 홀로 훌쩍 자라버린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십 년 전의 어린이와는 다른 사람이듯이, 영원한 것은 없고 시간이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투성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여정이지만, 눈과 마음으로 보고 추억으로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도 분명 존재한다. 백사장에서 묻혀온 반짝이는 모래처럼 알알이 빛나는 것들. 그것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발을 북돋아 준다.
다음 편지에서 만나요. 안녕!
- 당신의 친구, 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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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니
저도 3년전부터 거의 20년을 살아온 제 서식지에서 벗어나 타지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유년시절 제 눈으로 보이던 색채들과 풍경의 높낮이들, 향기 같은 것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상상하려고 하면 골목골목의 질감까지도 기억나요. 참 그때가 그립기도 한데 시공간이 이동함에 따라 제 기억들이 거기에 프린팅되어 영원히 박혀있겠죠 동영상은 사진의 프레임을 수백 수천장 겹친것처럼 그때의 시간,공간,제가 프레임으로 우주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그때의 저는 거기에 두고 지금의, 미래의 저는 앞으로의 시공간에 하나하나 새겨지며 또 시공간을 따라 이동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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