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는 단순히 나만의 여행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우리 엄마의 첫 해외 여행지이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첫 해외 여행을 떠나는 엄마를 보며 큰 책임감을 느꼈다. 엄마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기에 스스로 2인분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래서 출발 전, 입국 심사 질문을 검색해 기내에서 연습까지 했다.
마침내 LA에 도착한 후, 사촌언니와 조카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반가움과 설렘 속에서 여행은 빠르게 지나갔다.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시간이 당시에는 속상했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LA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단언컨대 날씨였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과할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라도 이곳에서라면 하루에도 수천 번은 넘게 긍정 회로를 돌렸을 거다.
그렇게 일주일 간의 짧고 굵은 여정을 마치고 밴쿠버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떠나기 싫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밴쿠버에서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했던 LA와 달리 이번 여행은 혼자라는 실감이 서서히 들었다.
밴쿠버행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돌발 상황이 생겼다. 안전벨트 착용법을 깜빡 잊은 것이다. 당황해 혼자 버벅거리던 나를 옆자리 승객이 도와주었다. 그녀는 베트남계 호주인으로 남편과 함께 종종 밴쿠버를 방문한다고 했다. 우리는 비행 내내 해리포터, 베트남과 한국의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웃고 떠들었다. 그 짧은 만남은 혼자라는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밴쿠버는 너무나도 흐렸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맑았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잿빛 하늘만이 날 맞이했다. 혜영이를 만나 반가웠지만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정체 모를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괜히 혜영이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숙소에서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룸메이트의 심각한 코골이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다. 에어팟과 헤드폰을 껴봐도 소용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숙소 앞 클럽에서 흘러나오던 Michael Jackson의 "Love Never Felt So Good"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환장의 콜라보였다. 점차 얼른 이 여행이 끝나기만을 바라게 됐다.
신은 공평하시다더니. 다행히도 출국 전 마지막 날, 기적처럼 날씨가 맑아졌다. 혜영이가 추천해 준 스탠리 파크와 잉글리쉬 베이를 가보기로 했다. 그러다 스탠리 파크로 향하던 도중, 실수로 정류장을 잘못 내리게 됐다. 뒤에서 빵- 하고 경적 소리가 울리더니 버스 아저씨가 불러 세웠다.
“스탠리 파크 가려는 거 맞지? 그럼 한 정거장 더 가야 돼. 얼른 타.”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다시 버스에 올랐다.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얼굴에 빨개졌지만, 막상 마주한 승객들은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혜영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밴쿠버 사람들은 여유로워. 재촉하는 것도 별로 없고, 교통카드가 갑자기 안되면 그냥 관광객이라고 말하고 타. 그래도 다 태워 줘"
누군가에게는 답답하게 보일지 모를 그 느긋함이 그날따라 커다란 배려로 다가왔다.
기분 좋게 스탠리 파크를 둘러보다 이어서 잉글리쉬 베이에도 도착했다. 해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걸으며 필름카메라로 풍경을 담고, 우스꽝스러운 동상을 찍어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해변 끝까지 걸으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여행을 그저 젊은 날의 사치로 여겼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실천하겠다는 결심도 했다. 그날 잉글리쉬 베이에서의 몇 시간은 내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사소한 일에 신경질적이었다가 고작 몇 시간 만에 평화를 되찾았다. 해변에서 느긋하게 산책하던 사람들,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며 웃음 짓던 이들의 풍경은 마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문득 혜영이에게서 느꼈던 변화가 떠올랐다. 반년 만에 본 혜영이는 어딘가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내게도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여행이 끝나고 전과는 상반된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됐다.
대학교 졸업식을 하루 앞둔 날,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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