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사랑을 남기고, 꿈을 따라 캐나다로 향하다

선택의 순간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2024.12.12 | 조회 34 |
0
|
Hailey From Korea의 프로필 이미지

Hailey From Korea

권성은에서 헤일리가 되기까지, 캐나다에서의 짧은 기록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께 폭탄 선언을 했다.

"저 캐나다에 가서 살 거예요"

워킹 홀리데이라는 제도를 통해 1년 동안 캐나다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부모님한테는 사실상 통보였다. 그들이 말릴 틈도 없이 서류를 모두 준비해 제출했다. 이어서 새롭게 결심한 건 사진을 배우는 일이었다.

미국 여행 전, 한 유명 사진관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원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뷰파인더 속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그동안 콤플렉스라 여겼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에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 이 긍정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진 학원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백수가 감당하기에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처음에는 유튜브로 독학하려 했지만, 새언니가 "기왕 배우기로 마음 먹은 거라면 아낌 없이 투자해 보라"고 조언했다. 자기 계발에 투자한 비용은 언젠가 배가 되어 올 거라 덧붙이면서. 그 말에 홀린 듯 사진 학원에 등록을 했다. 

 

사실 처음 학원에 가자마자 약간 후회가 들었다. 기껏해야 정원이 3-4명 남짓이었던 초급반이 이례적으로 8명 정원을 모두 채우게 됐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라 소수정예를 선호했건만, 앞으로 매주 6시간 이상을 많은 사람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기가 빨렸다. 강의실 안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마저도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이곳은 이름만 초급반이었다. 카메라를 다루는 경험이 전무했던 나와 달리, 다른 학생들은 이미 경험도 있고 기본적인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내가 가진 거라곤 친오빠가 선물해 준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뿐이었다. 화려한 카메라 라인업 앞에서 내 카메라가 유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사진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학원을 다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다. 소심한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친구들과 출사를 다니며 점점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가장 친했던 예리 언니가 개인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두면서 나 역시 학원을 그만둘 생각을 했다. 나는 시작이 빠른 만큼 포기도 빨랐다. 예리 언니 없는 학원에서 새롭게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웠던 건 나만 진심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동기들 중에는 스튜디오 취창업 등 사진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진지한데, 나만 취미로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학원을 관두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심병이 또 제대로 도져버렸다. 선생님한테 언제 말할지 타이밍을 재다가 놓쳐 버린 거다. 정말 어이없게도 관둔단 말을 못해 얼떨결에 중급반으로 가게 됐다. 

 

중급반에 온 뒤로, 재미 없을 줄 알았던 사진 학원이 의외로 재밌어졌다. 출사도 가고 실제 모델을 섭외해 촬영하면서 창작에 대한 흥미가 커졌다. 무엇보다 손성현이라는 아이와 친해졌다.

성현은 예리 언니와 동갑내기로 유독 그녀와 친했었는데, 언니가 관두면서 그도 나처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성현이 불편했었다. 초급반 때 딱 한 번 성현과 짝꿍이 된 적이 있었다. 나름 열심히 찍는다고 했는데 그게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게 아니죠, 이렇게 찍어야죠. 저도 이게 헷갈려서 수업 끝나면 유튜브로 찾아 봐요" 라며 성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별말 아닌데 괜히 혼자 찔려서는 그때부터 성현을 어려워했다. 열정적인 그의 모습이 나와 대비돼 보여 위축됐던 것 같다. 

그런데 둘 다 절친이었던 예리 언니가 떠나자 심심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함께 출사를 나가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더 친해졌다. 심지어 함께 스냅 계정을 열기로 했다. 곧 밴쿠버로 떠나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왕복 세 시간 거리의 합정으로 가는 길조차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학원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더니 딱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됐다. 이따금 친구들이 언제 캐나다에 갈 거냐며 물었지만, 대답을 미루곤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에 캐나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캐나다에 가겠다며 떠벌려 놓았는데 이를 어찌 수습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나에게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 중이냐며 다시 묻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캐나다행을 결심하게 된 건 사소한 말다툼 때문이었다. 작은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큰 싸움으로 번졌고, 그 와중에 성현이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 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캐나다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너와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는데, 어떻게 한순간에 다른 지역으로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역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사실 성현은 전부터 나에게 캐나다에 가라고 여러 번 말해 왔다. 자신 때문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들을수록 더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캐나다에 가지 않으면 언젠가 성현을 원망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원망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결국 나는 내년 2월에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비록 애초에 계획했던 1년은 아니었지만 반년이라도 캐나다에서 살다 오기로 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래의 내가 ‘그때 왜 가지 않았어?’라고 물을 때, 후회스러운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고도 모른 척 미뤄뒀던 캐나다가 다시 내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성현에게도 2월쯤 캐나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성현은 준비 과정 내내 묵묵히 나를 지지해 주었다. "넌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해."라는 든든한 말들과 함께였다. 아무렴, 캐나다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시작한 연애라지만, 내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캐나다에 간다고 해서 성현은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내 꿈을 존중하며 오롯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하루는 가기 싫어 눈물을 쏟았다가, 또 하루는 설레서 가슴이 벅찼다.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월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내가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성현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라 생각하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출국 당일 아침이 밝았다. 성현은 나에게 처음으로 쓴 편지와 시계를 선물했다. 그 시계는 성현이 매일 손목에 차고 다니던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다. 그 선물을 받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후에도 캐나다에서 두려움이 찾아올 때면 그 시계를 꺼내 보거나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시계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으면서. 이후 혼자서 출국장을 걸어가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온 만큼, 이 시간이 결코 헛되이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캐나다로 떠났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Hailey From Korea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Hailey From Korea

권성은에서 헤일리가 되기까지, 캐나다에서의 짧은 기록

메일리 로고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