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전
베란다 창으로 풀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어.
싱그럽고 맑은 향기였어.
요즘 아파트 화단의 나무를 다듬고 있거든.
몇 년 새 태풍이 난폭해지면서
부러진 나무가 차를 덮치기도 해서 미리 가지를 자르는 거래.
나무를 자르는, 어떤 것을 해치는 일이 이렇게 향기롭다니.
그 잔인한 향기를 즐기는 나는 잔인한 사람인가.
다 쓴 종이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잘려진 나뭇가지들을 봤어.
쌓인 나뭇가지들은 양 팔을 뻗고 쓰러져 있는 것 같았지.
항복, 항복.
이렇게 말하는 대신 냄새를 뿜는 건가.
태풍이 찾아왔어.
단지 안 나무들은 가지를 잃고 날씬해졌기 때문에
바람의 저항을 덜 받았지.
덕분에 나는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으려 애쓰며 걸어야 했고
우산이 시야를 가려 앞을 잘 살필 수 없었어.
그러다 우산을 뚫고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았지.
양 팔을 뻗고 바닥에 쓰러져 나는 말했어.
항복, 항복.
나에겐 향기가 나지 않았어.
대신 피비린내가 났지.
-안나
📖감상 한마디
여름의 감흥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태풍때문에 잘려나간 나뭇가지의 향기에서 바로 한 여름을 느꼈습니다. 결국 태풍을 통해 피비린내로 끝나는 오싹함이 있어서 여름을 또 떠올리게 했습니다. 여름을 이렇게까지 표현해낼 수 있는 참신한 시각에 놀랐습니다. ‘항복’으로 이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대조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소설 같기도, 시 같기도 한 이 글이 저로 하여금 글을 통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오광락
시각과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묘사와 표현들이 돋보였습니다. 평소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소재에서 빛나는 보석을 캐치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도 그 장점이 발휘된 것 같습니다.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움이, 가벼움 속에 진중함이 숨어있는 글이었습니다. 내용적으로도 반전이지만 단어 선택과 적절한 표현력을 통해 글의 분위기에도 반전을 준 점 역시 좋았습니다.
-SSY
태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가지치기를 했지만 오히려 돌멩이를 맞게 되었다는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를 재미있게 표현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감각적인 표현은 마치 그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었고, '향기를 내며 쓰러져 있는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맞아 피비린내 나는 나'라는 대조적인 이미지가 글에 몰입감을 더해주었습니다.
-조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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