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1)
나는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단순히 암기력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삶에서 마주친, 특히 어린 시절 겪었던 굴곡의 순간마다 있었던 일을 나는 그리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막연히 어디론가 하염없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군 시절이 특히 그렇다. 그때의 나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심지어는 아무 일도 없어도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아내곤 했지만 왜 그랬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우울증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흔히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인 모양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각성이 적절하게 일어나지 않아 자기 주변의 환경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을 빠릿빠릿하게 알아채고 반응해봐야 더 우울할 뿐이니까. 의욕이 충분하다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힘마저 없다면? 그럴 때는 그저 멍하니 있는 것도 나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잠든 듯 깬 듯, 나를 스치는 모든 것을 그저 지나치며,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드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몇몇 기억은 굉장히 선명하다. 그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들추면 따끔한 상처로 남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짜이진 않는다. 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 나의 군 시절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도 별로 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안 쓰는 전선과 잡동사니 따위를 되는 대로 쑤셔박아 엉망이 된 서랍장을 들춰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젠간 정리하긴 해야지. 그런데 어디서부터? 음, 귀찮은데 다음에 하지 뭐. 그 와중에 자주 쓰는 물건 같은 것은 쏙쏙 잘 빼놔서 일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어쩌면 이렇게 나의 삶 한 켠을 외면하며 지내도 평생 아무 문제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든 정리를 해야 하는 과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어쩌면 이 먼지투성이 서랍장을 와르르 쏟아내고 나면 그 안에서 뜻밖의 소중한 것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런 게 없더라도, 적어도 나는 내 것으로 인정하지 않은 과거를 언제 마주할까 두려워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안에 지금의 나를 괴롭히고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빨리 치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퀴벌레라도 그 아늑한 과거의 무덤 속에서 알을 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군 시절의 기억을 정리하는 것은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막연하게 기대했던 목표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어렵게 마음먹었다. 이렇게 길고 긴 서론을 떼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엉망진창인 서랍장을 꺼내 일단 바닥에 쏟아내버렸다는 것이다. 서랍에 십여 년을 잠자고 있던 그 무더기에서는 온갖 기억들이 뒤엉켜 있다. 아주 익숙한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것도 있다. 나는 그 무더기를 천천히 헤집는 나 자신을 본다. 생경한 기억의 더미를 뒤적거리는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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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대를 정말 두려워했다. 거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영향이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다소 결벽증이 있는 것 같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어도 정리벽이라고는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정리벽을 가족들에게 강요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아들 방에 들어가 책상이나 서랍을 훑어보고는 이게 무슨 돼지우리냐며 물건을 죄다 바닥에 밀어버리고, 정리가 끝나면 검사를 받으라고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고는 했다. 외출이 끝나고 방에 들어왔을 때, 내 방의 물건들이 차곡차곡 쓰레기통 위에 쌓여 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딴 정신머리로 군대에서 버틸 수나 있겠어?” 군대는 아버지의 잔소리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재수를 할 때 기숙학원에 가지 않을 거라면 당장 해병대에 들어가라는 이야기부터 나온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말 안 듣고 우는 아이를 물어가는 호랑이가 우리 집에서는 다름아닌 군대였던 것이다. 당연히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호랑이보단, 언젠가는 가야 하는 군대가 훨씬 현실감 있고 공포스러운 대상이었다.
아마 이건 아버지가 본인의 경험을 강력하게 투사한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제법 예민한 편이지만, 내게 그런 기질을 물려준 아버지는 나보다도 더 예민하고 까탈스러우시다. 그런 성격의 아버지가 까라면 까야 하는 군부대의 문화에 과연 잘 적응하셨을까. 아마 아버지의 군 경험 또한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만큼이나 끔찍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두고두고 자식을 협박하는 도구로 쓸 생각을 하셨겠지. 너무도 엇나간 방식이었지만, 그 협박은 당신을 빼닮은 아들이 군대에서 얼마나 고생할지를 이미 겪어봤던 아버지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었을 것이다.
내가 입대를 두려워했던 또다른 이유는 재수생 시절, 몇 달 머물렀던 기숙학원에서 내가 심각하게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대식 학원에서도 이렇게 적응을 못 했는데, 진짜 군대에서는? 그때도 이렇게 힘들면 어떡하지?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기숙학원에서 심각한 우울을 겪었던 나는 다시 우울의 수렁에 빠지는 것이 죽도록 무서웠다. ‘죽도록’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이런 우울이 또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또 이렇게 힘들면 나는 콱 죽어버리지 않을까… 아직 자살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든 자살 사고로 발전할 수 있는 우울이었다. 내가 그 우울을 생존의 위협으로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루씩 다가오는 입대는 나에게 문자 그대로 죽음의 공포였다.
덕분에 입대 전에 나는 이미 공포에 미쳐 있었다. 나는 유령처럼 캠퍼스를 떠돌았다. 과에서 아싸가 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정말 좋아하는 수업이나 졸면서 들어도 상관없는 교양 수업에만 출석을 했다.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 갖은 공을 들여 꽤 창의적이고 재밌는 발표를 해 놓고, 그 다음 수업부터 갑자기 사라졌던 적도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했던 교수님이 전화를 걸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셨던 적도 있었다. 누군가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었지만 정작 덜컥 걸려 온 교수님의 전화는 이상하게 무서웠다. 아마 나는 횡설수설하다 전화를 끊어버렸던 것 같다. 그 학기에 나는 학사 경고를 받았다.
꼬박 5년을 만났던, 그 때의 여자친구였던 K의 관심조차 무섭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 연애 초반이어서 적극적이었던 K의 애정 공세에도 나는 알 듯 말 듯한 선을 그었다. 심지어 고백을 받아줄 때 내가 입대할 때까지만 사귀자는 조건까지 달아놓고 연애를 시작했었다. 결과론적이지만 K의 애정이 있었기에 군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나는 입대를 앞둔 게 아니라 곧 죽을 사람처럼 굴었던 것 같다. 고작 군대가 뭐라고. 군대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고작 그 놈의 군대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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