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2)
뜻밖에도 입대를 준비하면서, 그니까 신체검사를 받고, 공군에 지원을 하고, 면접을 붙고, 신병훈련소에 입소하기까지는 꽤 재미있는 기억이 많다. 예컨데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검사를 받는 사람들에게 결격사유를 간단히 물어보는 절차가 있었다. 아마 감옥에 다녀온 전과가 있냐거나, 마약을 한 적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들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꽤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내 앞자리에 앉아서 그 문답지를 작성하던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는 이런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모히칸 머리를 한 그 사람의 질문은 머리 스타일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근데, 한국에서 마리화나도 마약으로 치나요?”
그 사람이 무사히 입대를 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짬밥을 먹느니 차라리 콩밥을 먹겠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질문이었을지도.
그 외에 다른 기억도 많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스타크래프트 2의 광팬인데, 공군에 지원했다 한 차례 떨어지자 합격의 기운을 받아야겠다는 핑계로 공군 소속 프로게이머로 병역을 치뤘던 임요환 선수의 경기에 여자친구의 손을 끌고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군 입대 직전에는 친구들을 이끌고 미용실에서 삭발식, 아니 반삭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오래된 외장하드를 뒤적거리다보면 아마 그 때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면서 찍었던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입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놀러가는 것처럼 연신 낄낄대며 사진을 찍었다.
그건 아마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군대 그까짓 거 별 거 아니라고, 2년 정도 재밌게 놀다 오는 거라고 말이다. 동네 놀이터에서 고등학교 동창과 병맥주를 들이키며 낄낄거리고 있노라면 군대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별 것 아닌 것처럼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 공포를 차마 직면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겁에 질려 외면하다가도,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 내가 한 행동들 중 어느 것 하나도 그 공포를 냉정하게 마주보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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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으로 입대를 하면 6주간 신병훈련소에서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는다. 내가 배정받은 특기였던 헌병(요즘은 군사경찰이라고 명칭이 바뀌었더라)의 경우, 2주간 더 헌병 특기 교육을 받고 나서 비로소 자대에 배치된다. 내가 입대할 때는 공군의 복무기간이 24개월이었고 훈련을 두 달 가량 받으니, 그 자대에서 본격적인 22여 개월의 군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훈련소의 문턱을 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진 내가 한 행동은 그저 질질 짜며 우는 것뿐이었다. 입대를 하면 헤어지기로 했던 여자친구와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 울었고, 입소식에서 부모님을 떠나며 울었다. 그리고 훈련을 받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울었다. 자대에서도 빈도는 조금 줄었을지언정 마찬가지였다. 눈물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흘렀다는 비유는 상투적일지언정 무엇보다도 적확했다.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고,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나는 매일 울었다. 이따금 내가 기분이 좋아 보일 때는 같은 생활관을 쓰는 동기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신병 훈련 중에는 자살 예방 교육도 있었는데, 매일 우울하던 사람이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면 그건 자살을 마음먹었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번 장을 쓰면서 첫머리에 했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잘 모르겠다. 그것들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훈련병 중에서도 나는 독보적인 울보였고, 이런저런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었다. 오해가 얼키고 설켰을지언정 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사고들이었다. 그 때에는 죽을만치 나를 괴롭혔던,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던 상처받은 기억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풍화되었다. 나를 경멸하거나 동정했던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의 기억들은 둥글어져 원래의 형체는 알 수 없없다. 그러나 풍화되었을지언정 그 조각들의 강렬한 색깔은 여전히 선연하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그 색깔 뿐이다. 죽음만큼 검었던, 어떤 분노보다 벌겋던, 슬픔보다 푸르렀던…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감정들이다. 나는 자격지심에 빠져 있었다. 쟤들은 다 훈련 잘 받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질질 짜고 있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민폐 덩어리가 된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대다수의 대한민국 남자들이 좋든 싫든 끌려오는 곳이 군대였다. 그런데 수능도 괜찮게 봤고, 서울에서 적당한 4년제 대학도 다니고 있는 내가 여기선 그저 우울증에 걸린 부적응자였다. 나의 자존감을 지탱하고 있던 어설픈 나르시시즘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았든, 얼마나 글을 잘 쓰든, 희나에서 얼마나 훌륭한 매니저였든 그건 군부대 정문을 넘는 순간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게 내 눈물을 닦아주진 않았으니까.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기숙학원 시절의 도돌이표 같은 생활이었다. 두어 달을 버티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기숙학원과는 달리 이 곳은 2년을 어떻게든 채워야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그 2년이 영원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고장’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우울과 스트레스는 뇌기능을 저하시킨다. 집중력과 단기 기억력이 떨어지고, 그 뇌기능의 저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실수가 많아지고, 그 실수로 스트레스를 받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런데도 같은 실수를 자꾸 반복한다. 그게 ‘초병 근무가 끝나면 막내가 뒷정리를 한다’ 같은 아주 쉽고 단순한 내용이어도 그렇다.
선임 입장에선 어땠을까? 예컨데 훈련에 필요한 물자를 점심을 먹고 나서 창고에서 같이 옮기자고 했는데, 이 후임이 까먹고 창고에 나타나질 않는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된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기억력이 나쁜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대화해보면 공부도 좀 했고 머리도 빠릿빠릿하게 잘 돌아가는 놈 같은데. 이건 아무리 봐도 우울증 핑계를 대면서 나를 엿먹이는 게 아닌가? 아무리 나를 이해하려 애썼던 사람도 그런 일을 언제까지고 참아주진 못했다. 또 까먹었어? 라고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툭 치던 사람 좋던 선임들의 미소도 한두 달이 지나면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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