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10) - 사랑, 또는 죽음에 관하여

사랑, 또는 죽음에 관하여

2022.08.03 | 조회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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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별 에세이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무언가 정리하는 일과 궤를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중요한 글을 써야 할 때는 제 주변과 스케쥴을 말끔하게 정리해놓고 나서야 키보드에 손을 올리곤 합니다. 하얗게 반짝이는 모니터와 키보드, 은은한 석양같은 독서등, 좋아하는 음악(보통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봄날, 벚꽃, 그리고 너), 그리고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또 아무것도 없는 세계로 방문을 닫고 걸어 들어가지요. 의자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 조그만 세계에 남아있는 것도 하나씩 천천히 존재를 잃어 갑니다. 이윽고 나 자신까지도요

 

그렇게 정갈하게 시작하는 글쓰기가 있는가 하면,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를 정리하기 위해 시작하는 글쓰기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글쓰기가 그렇습니다. 저는 어수선한 사무실의 구석에서 한가한 틈을 타 몰래 태블릿을 펼쳐놓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월급 루팡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행히 할 일만 제깍제깍 처리한다면 딴 짓 좀 한다고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인 ‘말년 막내’(말년이랑 막내가 같이 쓸 수 있는 단어였다니!)거든요.

 

저는 바로 이 다음 문장에 제가 무슨 말을 쓸 지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장의 소제목도 이 파일을 만들면서 즉흥적으로 붙였습니다. 독자님들에게 하는 소리 치고는 꽤 무책임한 소리지요. 글을 두 달이나 쉬면서도 앞으로 뭘 쓸지 전혀 생각해두지 않았다는 얘기니까요. 내일 보낼 원고를 오늘은 마감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이럴 때 꽤나 편리합니다. 분량을 채우기 위해 손이 가는 대로 주절거릴 수 있거든요. 그렇게 글을 쓰고 있노라면, 그리고 내가 그 주절거림의 첫 번째 청중이 되어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혼란의 가운데서 무언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연재를 쉬는 두 달은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몇 단락을 써내려간 지금은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혼란에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슬슬 보이는 것 같습니다. 네, 저는 사랑 또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볼 생각입니다. 주체도 객체도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또는 내가 나를 죽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달간 특별한 사건이나 길고 무거운 고심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낮별이라는 필명을 쓰면서부터 저는 줄곧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저 스스로가 이제야 깨달았던 것 뿐이지요.

 

 

사랑, 또는 죽음에 관하여

 

돌이켜 보면 죽음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살 충동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저 그게 희미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었다. 아마 부모님으로부터 화가 많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성격을 물려받은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학원 선생님이 지나가듯 흘린 ‘널 좀 이뻐해 봐, 임마’라는 말이 여전히 때때로 내 머릿속을 울리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를 예뻐하는 데 서툴다는 반증일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가치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런 나는 예쁘고 사랑스럽기보다는 화를 돋구는 존재였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은 날 충동적으로 집어던지는 유리병처럼 스스로가 통쾌한 소리를 내며 박살나기를 이따금 원했다. 

 

그런 자기파괴적인 충동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마트에서 한가득 봐온 장거리를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차를 몰아가는 길, 어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얼굴도 존함도 모르는 할아버지였다.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때 돌아가셨는지조차 잘 모르는 그 분은 어느 날 스스로 세상을 떠나셨단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할아버지를 지독하게 많이 닮은 아버지를, 그리고 그 아버지를 지독하게 많이 닮은 나를 대하는 것이 항상 유리그릇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우셨다고 고백하셨다. 조금이라도 잘못 다루면 깨질 것 같은 그 두 개의 유리그릇은 가만히 두어도 엎치락뒤치락 서로 부딪히며 짤그랑거리는 몹쓸 것들이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얼마나 힘드셨을까. 가뜩이나 예민한 남편과 아들이 히스테리에 빠져들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울 때마다 얼마나 불안하셨을까. 저러다가 끝끝내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자기 자신들마저도 던져버릴까봐 또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그러나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니 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내가 느낀 것은 정체모를 통쾌함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그래서 심지어는 나를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나의 일부가 어디로부터 비롯했는지 드디어 밝혀낸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같은 성을 쓰는 한 내가 언제까지고 짊어져야 할 나의 근원이었다.

 

그게 새삼스러운 충격이나 절망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지금은 안정된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들 언젠가 나는 다시 어둠의 바다에 깊이 빠져들 것이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바다에서 악착같이 헤엄쳐 나와, 폭풍이 지나간 해변을 애증 어린 눈길로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고, 어쩌면 정말 그 바다로부터 헤엄쳐나오지 못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친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가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지레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진 않은 일이었다. 그런 삶마저도 나는 사랑할 것이므로. 평온하고 아름다워도 사랑할 수 없는 삶보다는, 밉고 거칠고 상처투성이어도 내가 사랑하는 삶이 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 통쾌함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기쁨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나를 이뻐해야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언젠간 나는 나 자신을 죽여버릴 것이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해야 했다.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나의 모습을 치열하게 뜯어보며 어떻게든 이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했다. ‘널 좀 이뻐해 봐’라는 말 이후, 나의 삶에는 지옥같이 절박한 자기성찰과 사색의 나날들이 펼쳐졌다. 그런 나날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이 되어서야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삶이 이어지는 한, 계속 걸어나가야 할 길일 것이다.

 

다행히 그 길이 혼자 걷는 길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아니, 꽤 자주 나는 혼자였다. 이 길의 출발선에서 나는 혼자 출발했듯 이 길의 끝에서도 나는 다시 혼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축복받았던 것은, 글쓰기로 하여금 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가족들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오랜 길을 함께 시시덕거리며 걸어간 또래들도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도 있었고, 길 한복판에 멈춰서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 사람들도 있다. 그이들이 나의 시작과 끝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갈지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누구도 친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이들이다.

 

이제 나는, 그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글쓰기 공동체 흰 종이 위의 날개 소속 작가입니다. 심리상담과 문학치료를 공부했습니다.

https://litt.ly/heena_day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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