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봄비와 함께 마지막 벚꽃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우리는 아름다움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런데 요즘은 짧은 화양연화를 즐기는 것도 어딘가 마음이 불편합니다. 매일 들려오는 전쟁소식 때문이죠. 단지 유가와 환율, 물가가 올라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호린 피플들은 다들 느끼실 겁니다. 건조한 뉴스 화면 뒤에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짐작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 그리고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은 어느새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깊은 곳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타인의 고통앞에서 나는 평화로운 일상을 즐겨도 되는가'
이번 호에서는 호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율님이 이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붙들었습니다. 철학자 레비나스의 사유를 길잡이 삼아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가장 낮고도 단단한 답을 찾아갑니다.
구독자님, 이번 뉴스레터는 이런 내용으로 준비했어요!
- 봄날의 벚꽃 그리고 전쟁
- '신의 이름'으로 반복된 전쟁과 살육
- 인간은 왜 이토록 쉽게 '타자의 얼굴'을 지울 수 있는가
-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1분의 침묵'
나는 봄날의 벚꽃을 누려도 괜찮은 걸까
벚꽃이 피면 사람들의 걸음이 느려집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사진을 찍고,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과 나란히 걷습니다. 꽃 아래에서는 누구나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손안의 화면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어떤 날은 학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뜨고, 대피소 근처에서 아이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올라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중동에서는 학교와 병원, 민간인의 일상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있고, 유엔조차 조사에 나서야 할 만큼 참혹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꽃잎이 내려앉는 벤치에 앉아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문득 이런 질문이 스며듭니다. 먼 곳에서 죽음이 일상이 되고 있을 때, 나는 이 아름다운 오후를 누리고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 이 평화를 즐기는 나는, 너무 무심한 사람은 아닌가. 하지만, 이 질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오히려 닫혀버립니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너무 멀고 큰 비극 앞에서는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정치적·외교적 문제일 뿐이라고, 나는 그런 일과 직접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득하게 됩니다. 견딜 수 없으면 외면하게 되고 외면은 곧 무감각이 됩니다.

그 무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리가 냉정한 사람이어서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무감각에 맞서려 했고 스스로를 선하게 묶어두기 위한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법을 세우고, 도덕을 가르치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신을 불렀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 앞에 자신을 세워놓음으로써 양심을 지키려 했습니다. 종교는 그 절박함에 대한 오래된 응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자기 구원의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가,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이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신의 이름'으로 반복된 전쟁과 살육
종교는 본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죄를 덜 짓게 하고, 더 선하게 살게 하고, 욕망을 다스리고, 약한 자를 돌보게 하는 의지와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붓다는 자비와 보시를 강조했습니다.
그 출발점에는 신성과 본성을 깨달아가는 ‘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동일한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는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한다는 이름 아래 수십만 명의 사람을 죽였고,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백 년 넘게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도륙했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종족이 몰살당하는 현장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이름과 정의의 이름 아래에서 흐른 피의 강은 건널 수 없이 깊고 넓습니다.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편견과 확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종교는 너무나 쉽게 권력의 창으로 바뀝니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은 자기 이익을 정의라는 언어로 포장하는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 순간, 신은 더 이상 양심이 아니라 명분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명분 앞에서 인간의 공감은 작동을 멈춥니다.

현대 전쟁은 이 오래된 비극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습니다. 거리의 소멸입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상대의 눈을 보며 싸워야 했습니다. 끈적한 피의 비린 냄새와 비명이 닿는 거리에서 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잔혹했지만, 그 짧은 거리는 인간에게 최소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키웠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살상용 드론은 하늘 위에 떠 있고, 미사일의 발사 버튼은 상대방과 멀리 떨어진 주둔지에서 조작됩니다. 죽음은 프로그램된 좌표로 처리됩니다.
그런데 이 거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거리 안에 서 있습니다. 전장은 멀어졌지만, 전쟁의 이미지는 전파를 타고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빠르게 도착합니다. 문제는 그 이미지가 가까울수록 오히려 마음은 멀어진다는 역설입니다.
내 앞에서 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입니다. 괜찮니, 하고 묻게 됩니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수백 명이 다쳤다는 자막이 지나갈 때는, 그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끝까지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현대의 전쟁은 바로 이 구조 위에 서 있습니다.
그 거리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상대의 얼굴입니다. 얼굴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양심이 작동할 자리도 사라집니다. 그렇게 죽음은 체감하기 힘든 개념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인간은 왜 이토록 쉽게 타자를 지울 수 있는가
사라지는 얼굴. 이 문장을 평생 붙들었던 철학자가 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입니다. 레비나스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급진적인 윤리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가족 대부분을 홀로코스트에서 잃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그가 평생에 걸쳐 물었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인간은 왜 이토록 쉽게 타자를 지울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지움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찾은 답은 법도, 제도도, 도덕 원칙도 아니었습니다. 타자의 얼굴이었습니다.
레비나스에게 얼굴이란 단지 눈과 코와 입의 형상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가 내 판단과 계산보다 먼저 나에게 도착하는 방식입니다. 얼굴은 증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있음으로써 나에게 말합니다.
“나를 죽이지 말라.”

레비나스에게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호출이었습니다. 윤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이 나를 부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을 말하기 전에 먼저 타자의 얼굴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권력이 되는 순간이란, 어쩌면 신을 잃는 일이기 전에 먼저, 얼굴을 잃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이름 대신 진영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할 때, 한 사람의 고통 대신 대의의 정당성을 먼저 계산하기 시작할 때, 얼굴은 지워지고 남는 것은 표어와 명분뿐입니다. 그리고 얼굴 없는 세계에서는,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윤리의 출발점을 타자의 얼굴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본 뒤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찬양하는 사상도 아니고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잔혹해지고 무감각해지며, 타인의 얼굴을 숫자와 명분 뒤로 지워버릴 수 있는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휴머니즘은 바로 그 어두운 앎 위에 서 있습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인간을 끝까지 인간으로 대하려는 마음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지키기 어렵습니다. 역사는 인간이 이 같은 결심을 수없이 세우고 무너뜨려 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성으로 세운 원칙은 이성으로 반박할 수 있고, 도덕으로 세운 울타리는 더 강한 명분 앞에서 허물어집니다. 휴머니즘이 인간의 의지에만 기댈 때 그 의지는 너무 쉽게 꺾여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영적'이라는 말을 붙여보려 합니다. 휴머니즘이 인간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려는 결심이라면, 영적 휴머니즘은 그 인간 안에 깃든 침해할 수 없는 신성을 알아보는 시선입니다. 휴머니즘이 인간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면, 영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특정 종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끝까지 담을 수 없는 그 너머의 어떤 깊이를 가리킵니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안에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믿음. 그것을 신성이라 불러도 좋고, 자성(自性)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 전통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유명한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떠 있다는 뜻입니다.
강물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흐릅니다. 흙탕물이 흐르는 강도 있고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 강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비친 달의 모습도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진짜 달의 모습은 하나입니다. 영적 휴머니즘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인식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강물 위의 달이 아니라 그 모든 강물 위에 한결같이 비치고 있는 하늘의 달을 보는 것입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천 개의 얼굴은 천 개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깃든 영성의 빛은 하나입니다. 그 빛이 있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는 얼굴 앞에 멈춰 서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휴머니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멈춰 서서, 그 얼굴의 깊은 곳에 깃든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통찰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분류하거나 계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적 휴머니즘은 그런 안목으로 사람을 대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특정한 신을 믿는 종파가 아니라 신의 본질을 수용하는 통찰이고, 복잡한 교리가 아니라 규범을 뛰어넘는 공감입니다.
고통을 끝까지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봅니다. 먼 곳에서 죽음이 일상이 되고 있을 때, 벚꽃 아래에서 웃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의 몰락일까요. 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벚꽃을 보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벚꽃을 보면서 나의 즐거움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다는 듯 살아가는 무감각이 문제입니다.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오히려 벚꽃은 이렇게도 읽힐 수 있습니다. 꽃잎이 바람에 흩어지는 걸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퍼집니다. 예쁘다고 느끼는 그 목소리 안에는 ‘이미 곧 지겠지.’라는 마음이 섞여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머물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벚꽃은 죄책감의 대상이 아닙니다. 꽃 앞에서 무엇이든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 감각은 이미 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은, 고통에도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고통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름다움 앞에서는 누구나 마음을 열지만 고통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석양을 보며 동료 수감자가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던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니었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래서, 아직 그 사람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런 감각 속에서 영성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벚꽃 아래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닫지 않는 한, 멀리 있는 고통 앞에서도 끝까지 인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쪽 눈으로는 생명의 찬란함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생명의 스러짐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틈을 영성이라는 실로 꿰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끝내 흉내 내지 못하고, 종교가 자주 망각해 온, 오직 인간에게만 허락된 영혼의 진폭인지도 모릅니다. 기계는 매뉴얼대로 처리할 수 있지만, 매뉴얼에 없는 것들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것끼리 분류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끌어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주 한쪽 눈을 감을 뿐입니다. 한쪽 눈으로 벚꽃을 보면서, 다른 쪽 눈으로 멀리 있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깨어있는 감각.
그 두 눈을 동시에 뜨고 있는 것이 아프고 불편하더라도 쉽게 감지 않겠다는 의지. 저는 그 중첩된 의식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영적 휴머니즘이라고 믿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1분의 침묵 '
세계를 바꾸는 일은 대부분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됩니다. 권력자의 집무실에서, 군사 기지의 모니터 앞에서 한 사람의 선의는 무력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거대할수록, 그 시스템에 저항하는 최초의 시작은 언제나 개인의 내면이었습니다.
뉴스를 보고도 바로 넘기지 않는 1분의 침묵. 숫자로 스쳐 지나갈 뻔한 죽음 앞에서, "이 사람에게도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떠올리는 얼굴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연민의 마음은 아주 사소한 반응의 차이지만, 그 사소함 안에 인간다움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다가 타인의 고통과 실패에 무감각해졌다면, 내일 다시 한 줄의 기사 앞에서 멈춰 슬픔을 알아차리고, 통계 속에 감춰진 얼굴 하나를 다시 꺼내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전쟁을 당장 멈춰 세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전쟁이라는 시스템이 우리 안에서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지워버리게 두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영성을 가진다는 것의 가장 낮고도 단단한 형태일 것입니다.
벚꽃은 올해도 어김없이 질 것입니다. 바람 한 번에 꽃잎은 흩어지고, 나무는 다시 초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도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역사는 그래왔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의 정의가 옳은가보다 누구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가를, 누구의 신념이 더 강한가보다 누구의 아이가 굶고 있는가를 떠올리는 마음입니다. 벚꽃 아래에서 우리는 웃어도 됩니다. 다만 그 웃음 안에도 이 세계의 무게가 함께 실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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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별
벚꽃핀지 일주일도 않되어 강하게 내린 봄비가 일찌감치 꽃을 떨구게 하여 전쟁중에 너무 들뜨지 말라는 신호처럼 느껴졌어요. 집의 어른도 수술로 병원에 계시고 있고요. 글을 읽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HOLYN
별님, 댓글로 다시 뵈니 더 반갑고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쾌차하시길 저도 기도할게요. 따뜻한 봄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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