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거의 한달여 만에 뉴스레터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새해 첫번째 레터는 호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율님의 통찰 가득한 글을 준비해봤어요.
사는 게 갈수록 팍팍해지는 요즘, 가장 가치가 떨어진 말들이 있어요. 공감, 자비 같은 단어들이죠.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문장이 만연하는 이 시대에 자비는 현실 감각 없는 단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기율님은 말해요. 자비는 타인을 위한 희생이나 감정적 위로가 아닌 결국, 지독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는 가장 지혜로운 생존 전략이라고요. 실제로 이는 과학적으로 여러 연구를 통해서 증명이 됐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몰랐던 '자비'의 깊고도 넓은 세계를 같이 한 번 들여다볼까요?
구독자님 이번 뉴스레터에는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 '자비'라는 말속에 담긴 4가지 뜻
- 왜 우리는 '고통의 서사' 안에 갇힐까
- 과학이 증명하는 자비의 놀라운 치유력
동양고전에 '공감'이 없는 이유
“왜 굳이 타인에게 공감해야 하나요?”
명상 지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공감이 좋은 거고, 해야 하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연한 의무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공감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어요.”
라고 말하는 분 앞에서, 솔직히 저도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험난한 세상에서, 상대의 고통을 헤아리고 함께 아파하라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왜 남의 고통까지 신경 쓰고 아파해야 하는 걸까?
그런 반응은 오히려 나를 더 소진하는 일이 아닐까? 저 역시 그렇게 의심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공감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건, '자비(慈悲)'라는 단어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부터입니다. 19세기 전까지 유교 문화권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의 말들이 쓰였죠.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현대의 공감과는 결이 다릅니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아파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반면 역지사지는 상대의 처지를 배려하는데 가깝지, 반드시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 함께 아파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자비'안에 숨겨진 4가지 마음

조금 더 찾아보면 전통적 사유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머무르는 감정적 행위 자체를 별도로 개념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감정보다 관계와 도리를 중시했던 문화적 맥락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하는 마음을 전혀 다루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가 관계의 질서와 의무에 집중했다면 개인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역할은 종교가 담당했습니다. 특히 불교 전통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머무르는 마음.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는 자비(慈悲喜捨)라는 네 가지 마음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자(慈)는 산스크리트어로 '메타(metta)'라고 합니다.
흔히 '자애' 또는 '사랑'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남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막연하지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 애정이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나무, 꽃, 강아지, 고양이... 그런 존재들을 향해 느끼는 따스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조금씩 넓혀가라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가까운 이들에게로, 다시 모르는 이들에게로 확장해 가는 마음이 자애입니다.
자애도 연민도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비(悲)는 산스크리트어로 '카루나(karuna)'라고 합니다.
흔히 '연민'으로 번역되며, 현대의 '공감'과 가장 가까운 개념이 바로 이 비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비를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대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를 포함합니다. 아파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를 향하는 것이지요.
연민이라고 하면 흔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감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다릅니다. 나와 상대가 다르지 않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저 사람의 고통이 내 고통일 수 있다는 것, 나도 저렇게 아팠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희(喜)는 산스크리트어로 '무디타(mudita)'라고 합니다.
흔히 '같이 기뻐함'으로 번역됩니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내 일처럼 기뻐지는 것이 희입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마음입니다. 상대의 기쁨 앞에서 우리는 종종 시기나 질투, 혹은 '나는 왜 안 되지'라는 비교의 마음이 올라오기도 하니까요. 희는 그런 마음 없이 순수하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상대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捨)는 산스크리트어로 '우페카(upekkha)'라고 합니다.
흔히 '평정심'으로 번역됩니다. 자애도, 연민도, 기쁨도 지나치면 집착이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가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내가 아파하는 만큼 상대가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사는 그 기대를 내려놓는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고르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사입니다. 무관심이 아닙니다.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아파하되, 거기에 매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지독하게 '나'만 보일 때, 고통은 괴물이 된다

여러분은 이 네 가지 마음을 읽으며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나와 타인을 사랑하고, 연민을 품고, 함께 기뻐하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 저는 자비희사가 단순히 감정적인 공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태도와 철학, 그 안에 스며든 자유롭지만, 따뜻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뿐이 아닌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는 실천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명상을 하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자비를 행하면서 자비가 타인을 위한 희생이나 감정적 위로가 아닌 결국, 지독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는 가장 지혜로운 생존 전략이 돼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공감이 정확히 자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감의 의미가 확장돼 자비가 될 때, 비로소 공감은 내가 왜 타인에게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갖게 됩니다. 이를 통해 공감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이 얼마나 삶에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무너질 때, 본능적으로 모든 신경을 '나'에게만 고정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
"이 고통과 불안은 언제쯤 끝날까?"
"사람들이 나를 한심하게 보진 않을까?"
우리는 고통을 단순한 감각이 아닌 '불행한 나의 서사'로 만들어버립니다.
'나'라는 존재가 비대해질수록,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고통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될 때, 그것을 나눌 곳도 버릴 곳도 사라집니다.
혼자 감당해야 할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출구 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요? 바로 그 답이 ‘자비’에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복통을 낫게 한 '이것'
2008년, 달라이 라마는 인도 보드가야에서 대중들을 위한 강연 중 극심한 복통을 느끼며 쓰러졌습니다. 진단명은 담석증.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는 두 시간 거리였습니다. 차 안에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세계적인 영적 스승이라 불리는 그조차도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때 차창 밖으로 우연히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맨발의 가난한 아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병든 노인. 그들은 가난과 질병,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사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간, 달라이 라마의 마음속에 강렬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토록 아프지만, 나를 돌봐줄 의사가 있고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저들은 나와 같은, 혹은 나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홀로 견디고 있구나."
그는 자신의 통증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창밖의 이들에게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비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집어삼킬 듯했던 날카로운 통증이 어느덧 희미해진 것입니다. 고통이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고 태도의 변화가 실제로 통증을 줄여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는 것이 내 육체적 통증을 줄여줄 수 있었을까요?
현대 신경과학은 이를 '자기 참조적 사고'의 감소로 설명합니다. 나에게만 집중할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는 과활성화됩니다. 이 회로는 고통을 단순한 신체 감각으로 두지 않고, "왜 하필 나에게", "이 고통은 언제 끝날까"라는 이야기로 엮어냅니다.
과학이 증명하는 '자비의 치유력'

고통에 '나'라는 서사가 덧입혀질수록, 괴로움은 실제 통증 이상으로 증폭됩니다. 그런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관심이 타인에게로 확장되면, 이 자기 참조적 처리가 줄어듭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비 명상 훈련은 DMN의 활동을 감소시키고, 통증 관련 뇌 반응을 변화시켜 실제 통증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스탠퍼드 대학교 자비심 연구소(CCARE)의 연구에 따르면, 자비 명상 훈련을 받은 참가자들은 삶의 만족도와 자기효능감이 유의미하게 증가했습니다. 불안과 우울, 반추적 사고는 감소했고, 외로움은 줄어든 반면 사회적 연결감은 높아졌습니다.
위스콘신대학교 연구팀도 비슷한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자비 명상을 꾸준히 수행한 사람들은 심리적 증상이 줄고, 감정 조절 능력이 향상되며, 전반적인 삶의 질이 높아졌습니다.
고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나만의 불행'으로 붙들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 무게는 훨씬 가벼워집니다. 결국 자비는 타인을 위한 '착한 일'이기 이전에, 비대해진 ‘나’의 무게를 덜어 고통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영리한 방법인 셈입니다.
명상의 '알아차림'이 지금, 이 순간의 실제를 보는 문이라면, '자비'는 그 문을 열고 나가 만나는 광활한 광장입니다. 자비는 거창한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힘들 때, “왜 나만 이럴까”라는 생각 대신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는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겠구나”라는 연결감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자비의 마음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홀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약해집니다. 하지만 나의 고통을 인류 보편적인 고통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평온을 빌어주는 순간 뇌는 '불안한 나'에서 '연결된 우리'로 모드를 전환합니다.
오늘을 버티는 힘, 작은 '자비 하나'
자비는 나를 소진하는 소모적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만 바라볼 때 고통은 출구 없는 감옥이 되지만, 시선을 타인에게로 돌리는 순간 감옥에 창이 생깁니다. 자비는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나'라는 감옥에 갇혀 질식하던 마음에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지루하고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 가는 회의실에서 자괴감이 밀려올 때, 지하철에서 피로에 짓눌려 꾸벅꾸벅 졸아야 할 때, 그런 자기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데서 멈추지 마세요. 내 옆자리 사람, 내 앞의 동료 역시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하루를 버티고 있음을 알아차려 보세요.
"이 사람도 나처럼 평온해지고 싶겠구나. 이 사람도 부디 오늘 하루 무사하기를."
스치듯 건네는 이 마음이 여러분을 조금씩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요즘에도 가끔 공감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분들을 만납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드립니다.
“타인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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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지난주 자비명상을 통해 에너지 공명을 경험한 이후로 길을 걸으면 종종 누군가가 떠오르며 눈물이 흐릅니다. 저를 있게 했고, 또한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그 존재를 영원히 부정하고 싶었으나....감출래야 감출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가 봅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 감정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상처받아 웅크리고 숨은 작은 소녀를 향해 조용한 자비심이 빛을 비춥니다. 아직은 흔들리는 작은 미등이지만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을 믿고 의지해봅니다.
HOLYN
소중한 댓글과 응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자비의 빛으로 내면과 삶을 밝히시기를 저도 명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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