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요즘 저는 AI 전문기자 시절보다 AI를 더 많이 씁니다. 저부터 AI를 많이 써보며 이해해야 구독자에게도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AI의 높은 생산성은 확실히 매력적이거든요.
물론 AI를 건강하게 통제해야 한다는(제가 늘 강조하는!) 관점에서 모든 글은 언제나 제가 마지막으로 검수하고, 공들여 수정합니다.
대신 기획, 자료 조사, 원고의 틀을 잡는 앞단의 과정은 AI가 많은 시간을 절약해 주고 있어요. 아마 가짓수로만 보면 덕분에 수작업 시절보다 하루에 서너 배 더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요즘은 일을 마치고 나면 왠지 모르게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분명히 AI로 더 빠르게, 더 많은 일을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기분이죠. 이 상태로 며칠을 보내다 보면 점점 더 지쳐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코드는 AI가 짜는데, 더 피곤한 개발자
이런 증상 역시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더군요.
최근 1년여 사이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AI에게 말로 설명하고 지시해 코딩하는 방식', 이른바 바이브 코딩이 대세입니다. 이 스킬을 도입한 이후 프로그램 개발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고 하죠.
그런데 최근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코드는 AI가 짜는데, 왜 내가 더 피곤하지?"
어떤가요, 저랑 비슷하죠? 모양은 다르지만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뇌과학과 인지 과학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들이 연구되어 왔어요. 그리고 해당 이론들은 오늘날 AI 시대에 더욱 강력하게 증명되고 있죠.
뇌는 할 일을 바꿀 때마다 비용을 냅니다
2009년, 워싱턴대학교 소피아 레로이 교수의 논문에서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바로 '주의력 잔여물(Attention Residue)'이에요.
연구에 따르면 우리 뇌는 작업 A에서 작업 B로 전환할 때, A에 대한 생각을 100% 종료하지 못합니다. B를 하는 동안에도 A에 대한 생각이 뇌 자원을 조금씩 잡아먹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납니다.
컴퓨터는 메모리만 충분하면 여러 작업을 동시에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요. 각 작업이 서로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뇌는 한 번에 하나만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구조예요. 중간에 전환이 잦을수록 집중력이 얕아지고, 결과물의 질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런데 AI와 일하면 어떤가요? AI는 작업을 빠르게 끝내고 "다음은 이거 어때요?"라고 쉴틈 없이 묻습니다. 그래서 보통 AI가 일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일을 하고, AI가 끝내면 확인하고, 또 다른 일을 시키죠.
의도치 않게 뇌가 가장 싫어하는 환경에 빠져들고 있는 겁니다.
일은 줄었는데 검증은 늘었습니다
여기에 1988년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존 스웰러 교수가 제시한 '인지 과부하(Cognitive Overload)' 개념을 얹으면 퍼즐이 조금 더 맞춰져요.
스웰러 교수에 따르면 인간이 한 번에 기억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제한돼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수행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죠.
하지만 AI의 답변은 늘 우리의 검토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틀린 건 없는지, 내 의도와 맞는지, 고칠 부분은 어딘지. 단순해 보이지만 이 과정은 의외로 다단계 집중력을 요구하는데요.
결과적으로 AI가 일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보여도, 복잡한 판단 작업은 더 늘어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저품질 결과물이 많으면 사용자의 스트레스 지수도 올라갑니다. AI가 내놓는 쓰레기 같은 결과물을 두고 '워크슬롭(Work slop)'이라는 표현도 생겨났을 정도예요.
집중의 시간마저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조지타운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칼 뉴포트는 2016년 저서 <딥워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가치 있는 노동의 결과물은 인지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방해 없는 집중 상태'에서만 나온다고요.
문제는 이 딥워크 상태에 진입하는 데만 최소 10~15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AI 확인, 알림, 작업 전환이 몇 분 단위로 반복되는 업무 환경에서는 그 10~15분을 제대로 확보하기 어렵죠.
결국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잦은 전환이 주의력 잔여물을 쌓고, 늘어난 검증이 인지 과부하를 부르고, 그 틈에 깊은 집중의 시간이 사라집니다.
일은 많이 했는데 뇌는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하루가 끝나는 거예요.
참 아이러니하죠?
이런 구조에서 우리가 AI와 제대로 협업하려면 뇌 구조가 AI처럼 변해야겠죠. 그런데 인조인간 시대도 아니고 윤리적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AI는 빠르게 일합니다. 문제는 우리 뇌는 그 속도를 따르기 힘들게 설계된 거예요" — 휴마이즘
대응 전략
오늘 하루 딱 한 번, AI 없이 20분만 한 가지 작업에만 집중해 보세요.
모든 알림은 끄고, 다른 탭은 닫고, 그 하나만.
그 뒤에 스스로 물어보세요. 인지적 피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마 왠지 모를 개운함이 느껴질 겁니다. 이게 바로 지난 뇌과학 AI 편에서도 소개한 의도적 마찰의 집중력 버전이에요.
우리가 뇌의 사고력을 회복하기 위해 귀찮음을 살려둬야 하듯, 업무 전환의 속도감에서도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원래 AI는 일하고 인간은 더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는 AI 개발의 원래 목표와도 부합하는 사회를 만들 거예요.
📖 오늘의 내용이 더 궁금하다면
→ 블로그: AI 쓰고 편해졌는데… 왜 더 피곤하죠?
📖 뇌과학 시리즈 1편을 아직 못 읽으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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