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는 이들을 위하여
어두운 죽음이 있기에, 삶은 이처럼 다채롭고 빛날 수 있는 거 아닐까.
익숙한 얼굴들이 내 방문을 열어 젖혔다. 우울과 불안. 오래 전부터 나를 심문해온 두 얼굴. 어둠 속에 혼자 누워 울고 있으면 어김없이 그들은 들이닥쳤고, 이번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래서 나는 왜 밥을 먹을 가치가 없는지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게 다 너무 힘들어서, 나는 꽤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다.
죽음을 생각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언제나 죽을 수 있기에 한 번 뿐인 삶이 오히려 소중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발버둥쳤다. 그러다 지금은 멀리 비엔나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필연인 죽음을 한 쪽 어깨에 짊어진 채, 매일 이런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병원을 들어서기까지, 상담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심리상담에서 여러 검사를 받고 드디어 병명을 들었을 때, 나는 슬프지 않고 안도했다. 비로소 설명하기 힘든 무겁고 떨리는, 이 오래된 감정들을 설명해줄 확실한 이름이 생긴 거니까.
그리고 꽤 오래 공개적으로 내 병명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오픈했는데, 필요할 때 나보다 괜찮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걔는 왠지 얘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더라.',
'어떻게 죽음을 그렇게 쉽게 말해? 남은 가족들은 생각 안 하니. 무서워라.’
하지만 정신병이 이제야 막 조명 받기 시작한 세상에서, 가끔 나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했다. 아무도 나와 내 병에 대해 확실히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각자의 억측과 편견으로 어느새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각자 자기 살기 바쁜 한국 사회에서, 죽음이 있음을 알기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상담선생님은 그렇게 반복적으로 '내가 나를 알아 봐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던 것 같다.
서로가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위로가 되었던 지난 우울증 자조모임들.
그게 너무 어렵고 외로워서 3년간 우울증 자조모임을 운영했다. 각자의 아픔과 그것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 꺾여 죽음을 생각했던 시간들을 공유하며 위로를 나눈 시간들.
나는 그래서 내 병을 미워하지만 너무 미워하진 않으려 한다. 덕분에 내 세상은 한결 섬세해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조금은 이해해보려 노력하게 되었으니까. 죽음을 생각할 만큼, 삶엔 큰 아픔도 있음을 알기에 난 더 겸손해졌으니까. 이렇게 나처럼 매일 마음을 가다듬고, 죽음과 삶을 오가며 애쓰고 있을 당신을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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