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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션이 꺼질 때 비로소 켜지는 것들

박제되지 않는 순간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기억

2026.05.20 | 조회 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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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eX

🧐 Summary

1️⃣ 고정된 물질이 없는 티노 세갈의 작품은 그 휘발성으로 인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2️⃣ 외부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판단해야만 할 때, 뇌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스위치를 켭니다. 

3️⃣ 친절한 도움도 좋지만, 사용자가 스스로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여백을 설계할 때 오히려 더 강렬한 기억과 몰입감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지난 주말엔 5월에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햇살 아래 바닷가에서 여름 무드를 느끼고 왔는데요, 이번 달 내내 나누고 있는 주제인 망각과 휘발성처럼 어느새 햇살은 사라지고 조금은 가라앉은 온도가 가득하네요.

얼마 전 저는 이 휘발성이 예술과 만났을 때에 어떤 경험이 탄생하는지 느끼고 왔습니다. 요즘 리움 미술관에서 뜨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전시가 있죠. 리움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까만 정장을 입은 사람 몇 명이 걸어다니다가 갑자기 정적을 깨고 관객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This is so contemporary!" 깜짝 놀라는 사람도, 즐거워하는 사람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다양한 반응을 하는 관객들을 맞이하는 이 웰컴 메시지가 바로 티노 세갈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정치학과 안무를 함께 전공한 독특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현대미술의 이단아, 티노 세갈의 전시가 지금 리움 미술관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죠.

image : 연합뉴
image : 연합뉴

박제되지 않는 가치

티노 세갈의 작품에는 고정된 물질이 없습니다. 스케치도, 조각도, 설치물도 없죠. 그의 작품은 작가에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공연자(Interpreters)들이 표현하는 움직임과 대화로만 존재합니다. 당연히 현장 촬영과 녹음은 엄격히 금지됩니다. 티노 세갈은 공연자들에게 아주 디테일한 지시를 하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공연자가 그 순간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위해 비워두기도 한다고 해요.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매번 조금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사진과 영상으로 박제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전시가 각광 받는 이 시대에 그의 작품은 놀랍게도 철저히 휘발성을 띱니다. 하지만 이 휘발성은 오히려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작품의 무결성(integrity): 우리는 데이터가 변경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특성을 데이터의 '무결성'이라고 하죠. 티노 세갈의 작품 역시 무결성을 가집니다. 녹음이나 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미디어를 통해 복제되거나 2차 가공될 여지가 없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작가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재해석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 선입견 없는 온전한 경험: 관객은 방문 전 정보를 철저히 제한당합니다. 저는 미술관에 가기 전에 전시에 대해 검색을 해보곤 하는데요, 이 전시는 그 어떤 시각적 스포일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작품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어요. 오롯이 스스로 느끼고 해석할 여백이 주어지는 것이죠.

• 희소성이 주는 가치: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그 공간에 직접 가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일회성 경험의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또한 매번 조금씩은 달라지는 작품의 특성 또한 이 가치를 더하죠.


뇌의 스위치를 움직이는 네비게이션

우리는 친절한 가이드와 완벽한 데이터가 있을 때 세상을 더 잘 탐색하고 기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지과학자들은 정반대의 사실을 말해줍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연구팀은 사람들이 복잡한 런던 시내에서 길을 찾아가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길을 찾아갈 때와, 네비게이션의 음성 안내를 그대로 따라갈 때의 뇌 활성도를 비교해보았어요.

그 결과, 스스로 길을 찾을 때는 공간 기억과 탐색을 담당하는 뇌의 핵심 부위인 해마가 활발하게 작동했지만, GPS의 지시를 따르는 순간 이 영역들이 마치 전원을 끈 것처럼 완전히 잠잠해졌습니다. 뇌가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있으니 난 생각할 필요가 없어'라고 판단하고 인지적 자원 처리를 중단해 버린 거에요. 저희가 작년 뉴스레터에서 몇번 다루었던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 즉 뇌의 외주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티노 세갈은 미술관에서 바로 이 네비게이션을 꺼버립니다. 사전 정보도,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도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존할 곳이 사라진 관객의 뇌는 그제야 움직일 준비를 시작합니다. 내 눈 앞에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공연자의 눈빛, 음악 소리,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오직 내 안의 감각만을 이용해 눈앞의 일회성 경험을 가장 강렬하게 흡수하죠. 작품의 휘발성이, 역설적으로 관객의 온 감각을 깨워 더 강렬한 기억을 만들어 내는 트리거가 되는 셈입니다.


여백의 경험을 제공한다면

이 전시는 제품의 경험을 설계하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은 사용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완벽한 팁과 섬세한 네비게이션, 나의 히스토리까지 모든 것을 잘 정리해서 제공합니다. 하지만 모든 경로를 완벽하게 제안해주는 환경에서, 사용자는 오히려 서비스에 몰입할 이유가 없어질지도 몰라요. 실패할 가능성도, 의도한 적 없는 경험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도 없을테니 굳이 집중할 이유도 없죠.

우리가 지향하는 경험은 어쩌면 무조건적인 사용자 지원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도적인 예측불가능: 사용자가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도록 약간의 불편한 새로움을 설계할 때, 사용자는 뇌를 켜고 보다 적극적으로 서비스에 몰입합니다.

• 발견의 기쁨: 모든 기록을 다 제공하기 보다는, 사용자의 현재 맥락에서만 일회성으로 제공되는 인터랙션이 사용자에게 더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티노 세갈이 작품에 휘발성을 더하면서 관객에게 가장 능동적인 경험을 선사하듯이,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제품들도 일정 수준의 휘발성을 더한다면 사용자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몰입의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티노 세갈의 전시가 가진 휘발성 덕분에 이 전시가 아주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항상 브랜드와 제품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지 고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인상을 사람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오늘 뉴스레터를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어요.

구독자님이 최근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렇게 의도를 가지고 설계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는 순간은 늘 사람의 순수한 '감각'만에 의존하여 받아들인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자의 순수한 감각에만 의존하는 시간을 하루 중 잠깐이라도 가져보시길 바라며, 다음주에는 5월의 마지막 '휘발성'에 대해 새로운 글로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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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pen.kakao.com/o/gBHmseah


Reference

[1] https://www.ucl.ac.uk/news/2017/mar/satnavs-switch-parts-brain

[2] https://www.yna.co.kr/view/AKR20260225114900005

[3]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92?param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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