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이은희 씨(이하 은희 씨)는 파마끼 없고 앞머리가 있는 풍성하고 하얀 단발머리를 한 70대 후반 여성이다. 20여 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낸 후 독신인 딸과 둘이 산다.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은 수원에서 서울에 있는 셋째 딸 집을 오가며 손녀를 돌보는 일을 한다. 나머지는 취미 생활로 신나게 드럼을 치며 스트레스를 날리거나 문화센터에서 바리스타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듣는다.
은희 씨는 직접 내린 커피와 전날 구워둔 스콘을 문화센터 사람들과 나누는 인심 좋은 할머니다. 손녀 이야기를 할 때면 동그란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오른다. 글쓰기 수업 중에 전업주부로만 살던 그녀가 사회로 나가서 가진 직업과 일에 대한 서사가 드러났는데 꽤 흥미로웠다.
흰 단발머리를 날리며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할머니 이은희 씨의 일과 삶의 여정이 궁금해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물리학을 전공했어요. 과에 저 혼자 여자였어요. 어렸을 때 꿈은 글 쓰는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셨어요. 당신이 신문기자니까 (시대적 상황 때문에) 고초도 겪으시고 글쟁이는 힘들게 산다며 안정적인 교사가 되길 원하셨어요.”
아버지는 아이를 기르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공부하고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던 분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교육적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권유로 물리학을 선택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원했던 교사가 될 틈도 없이 주변 성화에 못 이겨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했다. 딸 셋을 낳았고 시집살이는 대단했다.
시댁에서 분가를 하면서 전업주부였던 은희 씨는 사회에서 첫 직업을 가지게 된다. 그때가 30대 후반이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경력단절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적이었다.
“그때가 88올림픽 시작 전이었어요. 백화점에 직원 모집 공고가 난 걸 보고 시험을 쳐서 소비자상담실에서 일했어요. 첫째 국민학교 3학년, 둘째가 1학년이 되던 해였어요.”
그녀가 갑자기 일을 하러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동기를 물었다.
“해방되고 싶었어요. 남편이 약국을 했는데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직원들 것까지 해서 도시락을 날랐어요. 힘들어도 정성스럽게 준비했는데 약국에 자주 오셨던 시숙이 돈 벌어서 먹어 조진다고 했대요. 힘이 빠지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대학에 졸업장 떼러 갔는데 학과 동기였던 머슴애들이 떡하니 교수가 되어 있거나 부교수를 하는데 거기서 나도 자극을 받았지. 그래서 나도 이렇게 멍청하게 집에 있을 게 아니라 일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애들도 어느 정도 컸고.“
아침에 아이들 챙기고 남편 점심 도시락(그녀의 출근으로 약국 직원들은 도시락 대신 점심값을 받았다)과 아이들 간식과 저녁을 다 준비해 놓고 출근했다. 직장과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만 한데도 시집살이와 점심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 것 같았다.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고 표현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가 일을 하니까 각자 해야 할 일을 잘 챙기며 자립심을 길렀다.
백화점 소비자상담실에서 일하며 별별 고객을 다 만났다. 입었던 옷을 세탁해서 가져와 반품하는 사람도 있고 CCTV가 없던 시절이라 옷을 갈아입는 척하며 입고 가거나 바겐세일 기간에는 소매치기도 기승을 부렸다. 소매치기가 현금만 빼가고 버린 지갑을 주인 찾아주면 전화번호 수첩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며 감사 인사도 많이 받았다.
“힘들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며 백화점에서 3년간 일했어요. 그러다 호텔에서 한 번 일 안 해보겠냐고 제안이 왔어요. 그때 외국계 호텔로 이직하게 됐어요. 호텔 기물을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호텔 안 모든 업장에 있는 기물은 입고하고 출고할 때마다 일일이 확인해서 서명을 받아야 한다. 입출고가 정확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프랑스 식당에 와인잔이 나갔는데 깨지면 프랑스 식당에서 사유서를 받아서 확인해야 한다.
“연말 행사나 웨딩이 있으면 초비상이에요. 바쁠 때는 부서 관계없이 행사에 다 투입돼요. 웨딩 예약 인원이 보통 400명은 되는데 12시와 5시 예식 사이에 그릇을 맞추기가 진짜 힘이 드는 거예요. 모든 식기세척기를 풀로 돌려도 유리컵은 리넨으로 일일이 닦아야 해요. 식기세척기에서 금방 나오면 뜨거우니까 냉장고에 넣어 식혀서 나가요. 그 시간내에 다 세척해서 다음 예식 인원에 못 맞추면 큰 일 나니까 아주 노심초사하는 거죠. 그래도 즐겁게 일했어요. ”
외국계 호텔은 남녀 간 직급 차이 없이 월급을 똑같이 준다. 근무가 타이트한 대신 초과근무 시간에 대해선 1분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쳐줬다. 대신에 지각을 하면 차감한다. 월급 체계가 공평하니까 일 할만 했다. 명절이나 연말에는 방이 모두 차고 식음료 매출이 좋아서 그 수입을 직원들에게 분배해서 상여금을 두둑하게 받았다. 당시 보통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서 그만큼 돈을 받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호텔은 여성 매니저들이 많아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돕는 분위기였다. 맏며느리인 사람은 명절 근무를 빼주고 다른 사람이 대신했다.
“나는 장남 며느리가 아니니까 명절 근무를 섰는데 그것도 좋았어요. 대신 차례비를 넉넉하게 보낼 수 있었죠. 호텔에서 근무는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았어요. 그래도 모든 것에는 애환이 있죠.”
7시 20분에 출근해서 3시 20분에 퇴근을 했다.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6시 전에는 공항버스를 타야 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4시 30분이지만 그만큼 집안일도 많이 한다.
“어머니께서 김치 담아달라고 하시면 새벽 3시까지 다 담고 못 자고 출근하기도 했어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지만 집에 오면 가사와 가족, 시댁 일까지 챙겨야 하니까요. 호텔 일은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10년 정도 했어요. 그러니까 남서울 호텔이 리츠칼튼으로 바뀔 때까지 했네요.”
오랫동안 일했던 호텔을 퇴사하고 은희 씨는 식당을 차리게 된다. 그때가 IMF 전이었고 그녀는 50대였다.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이 제가 호텔을 그만두게끔 흘러갔어요. 새사람이 들어오면 젊고 빠릿하게 일도 잘하고 나는 꼰대가 되는 거죠. 그때 또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중간에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돌아가시고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상황이 됐고요. 그때부터 어머니를 33년간 모셨죠. 당시 제 이름으로 된 건물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가에 세 든 사람들이 자주 바뀌어서 골치가 아픈 시기였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으면 너 식당 해라고 늘 그랬거든요. 그래서 설렁탕 가게를 했어요.“
식당 일은 상상이상으로 힘들었다. 예약하고 노쇼도 다반사고 계산 안 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에 혼자 있을 때면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종업원들이 속을 썩이는 일로 자주 골치가 아팠다.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 싸우면 칼을 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함께 하다 보면 끈끈해져서 식당에 파출부로 오던 사람도 몇 년을 함께 했다. 그렇게 씩씩하게 잘 운영하던 식당도 몇 년 만에 접게 되었다. 원치 않았지만 보증을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고, 불행히도 장사를 하던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
“한겨울에도 온몸에 땀이 나서 잘 수가 없는 거예요. 영하 날씨에 거실에 앉아 에어컨 틀어놓고 있어도 땀이 안 가셔서 선풍기까지 같이 틀었어요. 그렇게 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았어요. 거기다 갑상선에 이상이 와가지고 집에서 폐인처럼 있으니 딸들이 엄마를 저렇게 두면 안 되겠는 거죠. 나를 밖으로 나가게 하려고 좋은 무료 교육이 있다며 받아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가게 됐는데 아기 돌보는 교육을 하더라고요. 3개월 동안 이유식 만드는 것, 아기 마사지, 동화 구연, 머리 감기기 뭐 별거 별거 다 가르치는데 내가 아이 키우던 때랑 많이 달랐어요. 나가보니까 배우는 게 재밌더라고.”
교육을 다 받고 나자 수료증을 주며 취업을 해야 된다고 했다. 알고 보니 아기 돌보미 교육은 여성인력개발원에서 주관해서 60세 이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취업 무료 강의였고 면접을 봐야 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다른 시터는 얼굴만 봐도 울었다는 아기가 나한테는 기어 와서 무릎에 앉아서 웃는 거예요. 아이 엄마가 놀라서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아이가 저를 선택했다고요. 그 소리를 들으니 안 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은희 씨는 처음으로 7개월 아기 베이비 시터가 됐다.
“그게 있잖아요. 나의 시름을 다 잊게 되더라고요. 안고 다니고 유모차 태워서 매일 산책시키면서 까꿍하면 웃고 밥해주면 밥도 잘 먹고 그 모습이 너무 예쁜 거야.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는 이유식 만들고 아기 빨래도 했어요. 그냥 아이가 너무 예뻤어요. 별로 힘도 안 들고 재밌었어요. 9개월 정도 봐줬고 아기 돌도 지내고 좋게 헤어졌어요. 아기를 보며 모든 시름을 잊었고 내가 아기를 좋아하는구나 알았어요.“
아기 봐주는 일을 하며 기억에 남는 일은 장애를 가진 아기를 돌봤을 때다.
“아이 병원 치료받는데도 데리고 다니고 그랬는데 힘들더라고요. 그러더니 내 몸에 염증이 생겨서 몇 개월간 치료받느라고 그만뒀어요. 이후에 좀 봐달라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마침 작은 딸이 아기를 낳아서 봐주느라 못 갔어요. 그래서 항상 아련하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인생에서 바닥을 찍었던 순간 우연히 접한 아기 돌보는 일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100일만 봐주기로 한 손녀를 11살이 된 지금까지 수원에서 서울을 오가며 봐주고 있다.
“애가 자주 아파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내가 맡았는데, 아기 돌봄 교육을 내가 잘 배웠다 싶더라고요. 손녀가 웃고 안기고 안 떨어지려 그러니까 모든 시름을 잊어요. 손녀가 11살이 됐는데 지금도 애가 예쁘거든요. 아기 보는 일이 저한테 참 잘 맞는 것 같아요. 딸한테 월급도 받죠. 돈을 떠나서 손녀 돌봄은 제가 즐겁게 하는 직업이에요. 항상 웃음이 나요.”
흰 단발머리 휘날리며 드럼 치는 할머니.
2년 전쯤 무릎 수술을 하면서 은희 씨에게도 처음으로 개인적인 시간이 생겼다. 재활하러 다니다가 우연히 동호회처럼 운영하는 드럼 학원을 발견했다. 젊은 시절 드럼을 쳐보고 싶었지만 딴따라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배울 엄두를 못 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지 않고 드럼 학원을 등록했다. 처음엔 악보를 보는 것도 힘들고 킥을 밟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은 박자를 틀려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줄도 안다. 학원 앞에서 버스킹도 한다. 흰 단발머리 은희 씨가 버스킹을 하고 나면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음감, 박자, 전부다 너무 재밌어요. 음악을 들으면 드럼 박자에 맞춰 발이 까딱까딱해요. 스트레스가 풀려요. 결혼 안 한 딸과 사는데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는데 드럼을 배우니 그걸 풀어 버려요. 에이 요것아! 하며 두들기지. ”
할 수 있는 한 계속 드럼을 칠 생각이다. 최근 정식 학원을 다니게 됐다.
“선생님 내가 못한다고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나는 할머니예요. 젊은 사람이 5개월 걸린다면 나는 10개월이 걸릴 수 있어요. 학원 선생님께 그렇게 말했어요. 동호회 친구들과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는데, 20대부터 70대까지 직업군도 정말 다양해요. 내가 정식으로 배운 걸 동호회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해요. 스틱 잡는 법, 악보 보는 법, 어깨 힘주지 말고 팔목 힘으로 슬금슬금 치라고 하면서요.”
또, 이사를 하면서 학교 다닐 때 일기장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글쓰기 수업을 등록했고 흘러넘치는 마음을 풀어가는 시간이다. 또 좋아하는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수 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백화점에서 일할 때부터 연금을 냈더니 지금 받고 있어요. 퇴직금도 있고요. 자식한테 손 안 벌리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요. 딸들이 내가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도 떳떳이 살아남아서 지금 이렇게 즐겁게 사는 게 너무 고맙대요. 그렇게 살아줘서 너무 고맙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년의 여성의 삶이 다 비슷하지 싶어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나에겐 아직 먼 일이 것 같았다. 그런데 글쓰기 수업에서 들은 70대 후반의 이은희 님의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그녀도 젊어서 지금 내 나이만큼 일 때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워킹맘이었다. 그녀의 일에 대한 서사를 듣다 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지금 내 나이였던 엄마의 모습과도 오버랩 되고 내가 맞이하게 될 노년을 상상하게 된다.
‘나는 좀 다르게 살거야.’
내가 미혼일 때는 기혼자를 보며, 아이가 없을 때는 아이를 가진 엄마를 보며 다르게 사는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같잖은 생각을 했었다.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가고서야 삶은 의지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건방을 떤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제 노인을 보며 노년의 세계를 담아 본다. 당신의 경험으로 빚은 삶의 모양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영감을 얻어 보겠다고.
이은희 님을 인터뷰하며 시련이 닥쳐왔을 때도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배웠다. 글에는 그녀가 가졌던 직업적 서사를 주로 담았지만 사실 그녀가 가장 오래 해오고 있는 일은 가족 돌봄이다. 아이, 양가 부모님, 손녀에 이르기까지 결혼 이후 가족 돌봄 노동을 멈춘 적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 사회로 나가서 한 일은 셀프 돌봄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타인을 돌보는 일이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를 33년간 모시며 모녀 관계를 치유했다.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자 나가서 하게 된 일도 공교롭게 돌봄이었고 아기를 보며 모든 시름을 잊었다. 지금 손녀를 돌보며 느끼는 감정은 무한 사랑이다.
그리고 흰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뒤늦게 가진 자신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일들로 채우며 스스로를 돌보고 있다. “과정을 안 겪으면 나이가 들어서라도 겪어요. 그리고 넘치는 것을 흘려서 치유해야 해요. 글쓰기가 저한테 가슴에 맺혀 고여있던 것들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삶이 찾아오게 하는 시간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인터뷰어 이주영
라이프 아트 북 살롱 <아티스트웨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예술을 매개로 삶이 예술이 되는 콘텐츠를 기획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편견을 하나씩 부수어 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응원이 필요할 때 곁을 내어 줄 수 있는 삶에 관심이 갑니다.
저서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을까:인터뷰로 묻고 글쓰기로 답하다》,《다시, 시작합니다》, 《1YEAR DIARY》 인스타 @artistway.booksa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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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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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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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꽃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결국은 자기 돌봄이라는 것. 큰 울림이 있네요.
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오랜시간 타인을 돌보며 살아간다는 것,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돌봄도 필요하고 나도 늘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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