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눈은 쌓이지 않는다
오늘은 제주도에 눈이 내렸다. 온도를 체크해보니 0도, 혹은 1도였다. 영하의 날씨에서도 눈이 내리긴 하는구나. 진눈깨비가 하늘을 덮었는데 자동차 위에만 간간히 쌓일 뿐이었다. 비가 내린 듯이 바닥은 추적추적해졌다. 쌓이지 않은 눈은 시야를 가리는 도톰한 비에 불과하다. 눈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눈보라를 헤치며 15분 정도 떨어진 버스정류장을 가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눈코입에 죄다 눈이 들어가서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눈 밟을 때의 소리는 좋아하는데 그마저도 없다면, 뭐.
하루종일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제주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감성숙소는 어느새 익숙한 내 자취방이 되었다. 여기저기 옷이나 쓰레기가 널려 있어서 드라마를 보다가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치웠다. 짐이 워낙 많으니 아무리 치워도 감성이 내 생활력 넘치는 짐들에 가려지고 있었다. 문득 "맞다, 여기 제주였지!"하며 깨달을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려고 애썼다. 누워있다가 창문을 여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던지! 그래도 바로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고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몸은 마치 육지에서처럼 늘어져 있을 게 분명하니까.
잠깐 눈이 그쳤을 때 산책을 나갔다. 5분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외출 시간이었지만, 바다를 보기에는 충분했다. 눈이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니 제주의 날씨와 밀당하는 건가 싶었다. 아직 나는 제주와 썸을 타는 중인가보다. 변덕스런 날씨에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하겠다. 바람만 안 불면 제주도는 전혀 춥지 않고 따뜻한데, 바닷가의 칼바람이 영 문제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몸은 날아갈 거 같고, 바람이 불면 일부러 몸을 방향을 바람이 부는 반대편쪽으로 틀었다. 차라리 바람이 내 등을 밀어줄 수 있도록.
점심은 생라면으로 대충 때웠다. 자취하면 먹기가 어찌나 귀찮아지던지. 저녁은 어제 저녁에 먹었던 김치찌개(레토르트)와 꼴뚜기(전해주신 반찬 감사히 먹고 있습니다), 계란후라이로 대충 해먹었다. 내일 저녁도 샤브칼국수(레토르트)를 먹을 예정이다. 세상 참 편해졌다. 레토르트 최고! 재료가 별로 들어가지 않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자취 음식이 있다면 추천해주시길... 하루에 한 끼 밥 해먹기가 이번 한 달 살기의 목표다.
그래도 늘어지는 날에도, 바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제주살이의 장점이지.
제주 이후의 시간을 준비합니다
하루종일 놀다가 밤이 되어서야 노트북 앞에 앉았다. 웹툰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과 그밖의 모든 걸 섭렵한다. 휴대폰을 뺏어야 한다. 휴대폰에 제주의 시간들이 물들어 사라지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면서 미루는 건 오래전부터 이어온 나의 특기다. 나태해서라는 말보다는 'INFP'라서 그래, 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핑계 맞다.) MBTI 맹신론자의 말이니 가볍게 넘어가주기를.
제주도에 있는 동안은 글과 책에만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두고 온 것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아직 수료하지 못한 코딩 강의라던가... 혹은 바로 다음 달에 듣게 될 수업들의 수강신청. 코로나 시기라 신경써야 할 게 많다. 과연 비대면을 할지, 대면을 할지. 특히 나는 캠퍼스 간 복수전공 같은 걸 하고 있기 때문에 요일마다 캠퍼스 수업을 따로 설정해야 한다. 차라리 모두가 비대면이라면 한 요일에 두 캠퍼스 수업을 넣어버려도 될텐데, 그건 너무 큰 모험인가 싶다. 요즘 대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힘겹게 수업을 듣는다.
마지막 학년인만큼, 온전하게 모두 즐기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니게 된다.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행복의 기준은 덩달아 낮아진다. 그 기준이 낮아진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적당한 행복은 어느정도인가를 생각한다.
TMI지만 내일의 계획. 코딩을 좀 공부하고, 글도 좀 쓰고, 책도 적당히 읽을 예정. MBTI의 계획적인 J형이 아니라, 게으름뱅이 P형인 만큼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한다. 물론 그러다가 오늘은 휴대폰의 노예가 되었지만. 제주에 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휴대폰 꺼놓기인 거 같다. 휴대폰 중독은 자나깨나 조심해야 한다.
오늘의 교훈. 육지에서나, 제주에서나 휴대폰 중독을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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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
오늘은 문장들이 참 잔잔하고 보드라워서 마음이 가네요. 어떻게 한 달 내내 관광하고 몰아치듯 살겠어요.. 오늘처럼 조금 늘어지는 날도 좋다고 생각해요. 남은 시간들도 다양하게 물들여가시길 바랄게요. 오늘도 잘 읽었어요!
제주 한 잔
늘어지는 날에도, 댓글을 달아주는 리미님 덕분에 열심히 쓰게 되는 거 같아요! 열심히 물들여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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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
매일매일 꽉 찬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오늘처럼 여유를 부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날도 꼭 필요한 법이지요! 모든 날이 쌓여서 소중한 한 달이 되는 것이 무척이나 의미있다고 느낍니다! 오늘의 제주는 힐링 그 자체었다니, 같은 힐링이어도 제주는 다르잖아요🤗 오늘 글도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핸드폰... 부실거면 같이 부셔요;)
제주 한 잔
핸드폰... 부수러 한 번 가볼까요...? 한 달,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보낸다는 것 자체가 색다른 경험인 거 같아요. 메일을 쓰는 것도 어쩌면 힐링의 일종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특히 답글을 쓸 때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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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물
폰 중독이 정말 무서워요.. 라고 폰중독자가 말합니다..
제주 한 잔
폰중독자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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