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더이상은 미루고 싶지 않다면 지금 해야 할 건

더이상은 미루고 싶지 않다면 지금 해야 할 건

인생 최초로 포토샵을 배웠던 순간은 고등학교 수업 시간 때였던 것 같다. 미술 시간이었는지, 컴퓨터 시간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물 사진의 피부색을 밝게 만들거나, 주근깨를 없애는 등 아주 간단한 보정 작업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과정은 재밌다기보다는 어렵기만 했다. 어떤 도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자꾸 헷갈리기만 하고, 결과물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난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는 포토샵을 쓸 일이 거의 없기도 했고, 아무리 다시금 공부하려고 해도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져서 항상 포토샵 대신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아주 간단한 이미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어려운 포토샵 기능을 하나하나 배울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캔바, 혹은 누구나 무료로 간단하게 쓸 수 있는 피그마 같은 프로그램을 포토샵 대신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왠지 욕심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자인툴을 능숙하게 잘 다루는 사람들이 자꾸만 멋져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캔버스에 다양한 요소를 센스 있게 배치하고, 적절한 기능을 잘 활용해서 최종적으로는 자신만의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주 고민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준비했다. 일단 새해를 맞이해 구독료를 대폭 할인하는 기간에 맞춰 포토샵을 구독했고, 최신 버전의 포토샵 기능을 설명해 주는 책 한 권을 잡고 하루에 한 챕터씩 따라 해보았다.

그런데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으니까’,’나도 어려운 툴을 멋지게 다뤄보고 싶으니까’라는 간단한 목표로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걸까?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공부하고 나니, 맨 처음에 품었던 의욕은 사라지고 하루 이틀 미루는 날이 늘어났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새해 결심도, 다이어트도, 영어 공부도, 매 끼니 건강한 음식 차려 먹기와 같은 각종 할 일들은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내 삶에서 멀어져갔다. 처음의 의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염없이 미루다가 결국 잊힌 습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실 이러한 습관의 되풀이를 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냥 하는 것. 아무리 하기 싫고, 왜 해야 할지 이유를 모르겠고, 해야 할 힘이 없는 지친 상태라도 말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고민 많고 생각 많은 나를 스스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관점을 조금 다르게 조정해 보았다. 만약 이게 하기 싫다면 왜 해야 할지 그 이유부터 찾아보자고.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친 상태에서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자고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더는 미루지 않기 위해 지금 해야 할 건, 나를 힘들게 몰아붙이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게는 우선 이유를 찾는 게 먼저인 것 같았다. 왜 이것을 하고 싶은지,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 답을 찾는 데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인생에서 영영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내친김에 ‘올해는 내가 포토샵 공부를 미루지 말고 꼭 해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이유를 꼽을 수 있지만 일단은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싶다’는 것을 가장 첫 번째로 놓고 싶었다. 무엇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도 꽤 견딜만할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기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작년 말에 보았던 전시회에서 누군가의 3개월 치 기록이 담긴 스크랩북을 보고 감명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 폴라로이드 사진, 블로그에 쓴 글 등등 다양한 재료들을 출력하여 바인더에 일일이 오려 붙이고 정성스럽게 꾸민 그 열정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었는데 어쩌면 포토샵을 활용해서 디지털 스크랩북을 만들어보면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은 그동안 참 많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를 나조차도 알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목적 없이 떠나는 여정에 길을 잃는 건 그저 당연한 일이고, 헤매는 과정 또한 여행의 일부이니 그동안 방황했던 나를 너무 모질게 대하고 싶지 않다. 일단은 목적지를 찾은 것 자체를 축하하고, 이를 향해 떠나는 과정을 모험처럼 즐기고 싶다.

아무리 굳건한 목표가 정해졌어도 가끔은 흔들릴 때가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썩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그러니 또 금방 의욕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건 아닐지 등등 걱정은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저 이 과정을 즐길 수 있을지만 골몰해 봐야겠다.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들이 멋진 여행기를 들려주듯, 나도 나중에는 그동안의 여정에 대해 즐겁고 설렌 마음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날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기대도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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