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기회는 때때로 낯선 맛으로 다가온다

기회는 때때로 낯선 맛으로 다가온다

정말 별것 아니지만, 매일 아침마다 내게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결정을 해야 할 날이 왔다. 그동안 잘 마시던 커피 원두가 다 떨어져서 새로 구매할 때가 된 것이다.

늘 같은 카페에서 로스팅한 원두를 사용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최근에는 다른 카페의 원두를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구매했던 원두에 불만이 생긴 건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평생 그 카페에서만 원두를 구매하고 싶을 정도로 그곳의 원두를 좋아한다.

단지 그 카페에서 로스팅한 원두만이 정말 독보적으로 유일무이하게 맛있는 건지, 혹시 다른 카페에서도 내 취향에 맞는 원두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케냐,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등 발음하기도 어렵고 낯선 원두에는 각기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양한 곳에서 여러 번 맛을 보며 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새로운 원두를 탐색하곤 했는데, 그 과정은 항상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었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판매하는 원두, 마트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가성비 원두, 연륜 있는 바리스타분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 오랫동안 동네에서 사랑받은 유명 카페에서 로스팅한 원두 등 입맛에 맞는 원두를 찾기 위한 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결과는 언제나 아리송했다. 각 원두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고 ‘내 커피 취향은 이러하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기란 항상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맛있는 원두를 탐색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 지난 주말에는 그동안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카페를 찾아갔다. 일단은 원두를 구매하기 전에 정말로 이곳이 사람들이 인터넷에 남긴 후기대로 커피 맛집인지 궁금해서 우선 드립 커피부터 주문했다.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이 원두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설명을 꼼꼼히 읽어봐도 실제로 그 맛을 입 안에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그저 직감을 따라서 메뉴판의 가장 중앙에 있는 원두를 골랐다.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바리스타분이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잔 옆에는 어떤 종류의 원두를 사용했는지 상세하게 적힌 작은 카드도 함께 놓였는데, 커피를 한 입 마시면서 카드를 읽어보니 꽤 놀라웠다.

카드에는 이 원두에서 히비스커스, 석류, 밀크초콜릿, 자몽 등 다양한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적혀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정말로 한 입만 마셨는데도 왠지  풍부한 맛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말로 석류 맛이 나는지, 초콜릿 풍미가 나는지, 허브의 향이 나는지 세세하게 이해할 정도로 세련된 입맛을 가지진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저 ‘꽤 맛있다, 그치만 정말로 시다’는 생각 외에는 딱히 떠올릴만한 감상이 없었다.

커피 한 잔의 가격만 놓고 따져본다면, 입맛에 썩 맞지 않는 커피를 마시게 된 건 조금 아쉽긴 했다. 커피가 식을수록 신맛도 더 두드러져서 점점 내 취향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기회’를 주제로 레터를 썼기 때문인지 어쩌면 이런 경험도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에 조금 덜 부합하는 커피를 마셨다고 해서 이 모든 과정이 ‘괜한 모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딱 커피 한 잔만 마셔본 뒤 ‘이곳 커피는 내 취향과 멀다’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취급하는 모든 원두가 전부 다 내 취향과 빗나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쩌면 기대와는 다른 맛과 마주하더라도 다시 한번 선택을 해본다면 의외로 상상도 하지 못한 놀라운 기회와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커피를 다 마신 뒤에는 이곳에서 새로운 원두를 사 들고 돌아왔다. 조금 전에 마신 것보다 산미가 덜한 원두를 추천받아서 말이다. 원두와 함께 받은 카드에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길게 적혀 있었고, 구아바, 청사과 같은 과일을 포함한 아리송한 설명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낯선 메뉴판을 보고 거침없이 처음 주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원두가 어떤 맛일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말기로 했다. 정말 내 입맛에 쏙 맞는 커피가 탄생하든 그렇지 않든 이 또한 새로운 원두를 탐구할 재밌는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만 품으면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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