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레터 2.0 - 이전까지의 생각은 모두 잊고 쿠키 만들기

매달 새로운 주제의 에세이를 보내드리는 에피레터의 이번 달 주제는 ‘몰입’입니다.

이전까지의 생각은 모두 잊고 쿠키 만들기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새해 기운을 원동력 삼아, 지난 주말에는 평소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 보았다. 바로 내 손으로 쿠키를 만들어보는 것.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랑하고, 달달한 맛을 좋아하고, 부드러운 식감보다는 딱딱한 걸 선호하는 입맛 때문에 쿠키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디저트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부터 이 단순한 질문을 품게 된 이후로는 SNS에서 공유되는 간단한 베이킹 레시피를 저장하고, 마트에 갈 때면 간단하게 만들어볼 수 있는 쿠키 믹스 근처를 자꾸만 서성거리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 호기심에 쿠키 믹스를 사서 직접 쿠키를 구워보았는데, 만드는 과정은 재밌고 간편했으나 내 입맛에는 너무 달아서 아쉽기만 했다. 내 입맛과는 썩 맞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서일까. 그 이후로는 쿠키 만들기에 대한 관심이 꽤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베이킹에 대한 관심은 영영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새해를 한 주 앞두고 <옳은 실패> 라는 책을 읽던 도중 뜬금없게도 지난 번에 만들었던 쿠키가 생각났다.

<옳은 실패>는 실패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소개한 뒤, 우리는 이 중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옳은 실패’를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완전한 무지의 상태일 때는 일단 큰 고민 없이 최대한 많은 시도를 해야 성공에 가까워진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게 일상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내게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쿠키를 만드는 것처럼 사소한 행동을 할 때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삶은 얼마나 다채로워질까?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학원에 다니든 강의를 수강하든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얻고 싶은 성취가 있다면 실패나 거절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일단 나선다면 말이다.

이런 생각을 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한 마트에서는 때마침 홈베이킹 믹스 제품들이 1+1 행사를 하고 있었다. 매대에 올라간 다양한 믹스 제품을 구경하는 내내 ‘저번에 산 제품은 별로였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함부로 모든 것을 단정 짓기에는 아직 내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는 또 다른 생각으로 덮어버렸다.

그 대신 이전에 먹은 것과는 다른 제조사에서 나온 믹스 제품을 사고 집까지 돌아왔다. 겸사겸사 쿠키를 장식할 수 있는 데코 펜도 함께 샀다. 박스 뒤편에 적힌 설명서를 읽으면서 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들고, 그 반죽을 납작하게 밀었는데 생각해 보니 집에 쿠키 커터가 없어서 얇게 민 반죽을 다시 손으로 조금씩 뭉친 뒤 납작하게 눌러가며 쿠키 모양을 만들었다.

모든 과정이 참 간단하고 쉬워서일까. 쿠키를 만드는 내내 머릿속도 참 간단해졌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양의 반죽을 떼어낼 것, 뗴어낸 반죽을 살짝 누르되 그 두께가 너무 얇아지지는 않게 할 것, 쿠키 반죽을 판에 놓을 때 약간의 거리를 둘 것. 오로지 이것만을 염두에 두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SNS를 둘러보거나, 뉴스를 보며 사회 이슈를 정신없이 따라잡을 때는 가질 수 없었던 단순함이었다.

오븐에 쿠키 반죽을 넣고 뒷정리도 마친 뒤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만약 오늘 쿠키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했을지를 상상해 봤다. 평소의 내 모습대로라면 아마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해야 할 일, 어제 지나간 일, 앞으로 알아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끊임없이 집어넣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몰입이란 위대한 사람들이 거창한 작업을 할 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겠다는 걸 실감했다. 몰입은 완벽하고 뛰어난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저 한 번에 하나씩,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SNS를 보며 다른 사람과 나의 모습을 비교하는데 들인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직접 손이 만드는 결과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의 가치가 무척 크게 느껴졌다.

완성된 쿠키는 노릇하게 잘 구워졌지만 모양은 제각각이었고, 뒷면은 완벽히 익지도 않았다. 쿠키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데코 펜을 사용하는 것도 깜빡 잊고 그냥 먹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도 상당히 달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전에 사용했던 쿠키 믹스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맛 좋은 쿠키가 탄생했다는 점이었다.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아마 다음 쿠키를 만들 때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부엌을 들락거릴 때마다 식탁 한쪽에 자리 잡은 쿠키 믹스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곤 한다. 결과와는 상관 없이 그저 오로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과정에만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아 쿠키 믹스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몰입의 시간을 조금씩 쌓다 보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완벽한 쿠키 말고도 삶에서 어떤 또 다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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