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은 책 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원래 이 책을 오늘까지 읽고 레터를 쓰려고 했으나 보란 듯이 실패...하였으므로 대략 10퍼센트 정도의 분량을 남겨 두고 책 일기를 씁니다. (아마 별 일이 없다면 이 레터를 발송한 뒤 완독하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언젠가부터 여성 작가의 책들을 주로 읽게 되었는데요. 요즘 문학의 트렌드이기도 하고(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남성 작가들이 후순위가 되어버린, 참으로 낯설고 신기한 변화가 일어났으니까요) 읽다 보면 느껴지는 은은한 '남자다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성 서사를 주로 찾게 되다보니 남자 작가들의 글은 영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간혹 남자가 쓴 좋은 글을 읽으면 남자인데도 괜찮네? 라는 생각을 무심코 하게 되는데요. 스스로도 이 생각에 흠칫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 지금껏 읽은 남성 작가의 글이 제 독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성들의 글을 훨씬 더 오래 읽었으면서, 참 새삽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는, 반대 성별의 경우 저렇게 말할 일이 더 많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시감일 수도 있겠죠. 제가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남성 작가의 책으로서, 제가 좋아하지 않는 책의 요건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바로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입니다.
작가는 남성이고, 이 책은 단편집이며, SF 장르입니다. 제가 선호하지 않는 태그 세 개가 전부 모였죠. 그러나 재밌게, 진중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알게 된 건 모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요. 프로그램에 나온 작가가 이 책을 강력 추천했습니다. 원래 글 잘쓰는 또래를 보면 불같이 질투하는 저로서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글을 더 잘 쓸 수 없다면 읽은 책이라도 따라 읽어 보자. 단순한 전략이지만 퍽 건강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찾아봤는데 때마침 제가 새로 구독하기 시작한 전자책 어플리케이션에서 <종이 동물원>이 곧 내려간다기에 이것은 신의 계시다! 하며 틈틈이 읽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이자 이 책의 제목인 "종이 동물원"은 슬펐습니다. 아주 많이 슬펐지만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점과, 주인공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자기연민에 물든 주인공보다는 그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이 났습니다. 주인공이 후회하고 슬퍼하는 건 그다지 슬프지 않았어요. 네가 잘못했잖아...ㅎ

저는 오히려 "종이 동물원"보다 이후의 단편들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요! SF를 좋아하지 않지만 작가 특유의 영화적인 표현법과 일상적인 문체가 제법 두꺼운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천생연분", "즐거운 사냥을 하길", "파자점술사", "송사와 원숭이 왕"이라는 단편들을 아주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을 재밌게 읽은 거죠. 특히 아직 읽고 있는 마지막 단편("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증언들을 수록한 느낌을 줍니다. 특이한 점은, 시간을 여행하는 기계로 과거에 다녀온 이의 진술도 있다는 것이예요. 타임머신이라는 주제로 아픈 역사를 풀어내다니. 저는 이 작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생연분"과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방향에서요. 내가 나로서 나인 채 사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가장 잔인하고 연약한 생물종인 인간에 대해서요. "파자점술사"와 "송사와 원숭이 왕"은 오히려 "종이 동물원"보다 더 슬펐어요. 그 두 이야기는 제가 괴로워하고 분노하면서도 계속해서 하잘 것 없는 것들의 민낯을 들춰보게 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마지막 단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는 마루타 부대, 즉 731부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겹기 이를 데 없는 실제 이야기도 나오고요. 저 또한 과거에 읽은 바 있는 실험들을 소설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느껴지는 건 작가가 이 끔찍함을 나열할 때 악마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과도한 폭력성을 전시해 보는 이에게 악마적인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는 거죠. 증언하는 사람들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오늘 하루의 일상을 이야기하듯이요. 그 점이 더욱 현실적이고 끔찍합니다. 먼 과거의 일이지만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것만 같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국적은 비록 다르지만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상처와 고통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유난히 자주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일어나는 소름을 가라앉히며 읽었습니다. 출퇴근길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 심연을 들여다볼 생각이 들 때, 하나 하나 음미하며 읽기에 참 좋습니다.
당신의 심심한 목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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