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봤다. 유난히 입술이 반들거려 손으로 무심코 쓱 문지르는데, 그 손에서 타액 냄새가 유난하다. 연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첫키스에 대한 로망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적어도 이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연주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이렇게 만나는 것일 텐데.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자 조금은 평온해진다. 석양빛을 띠는 무드등을 켜놓은 채 방 불을 끄고 침대에 가 눕는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다음 날의 데이트를 위해 옷을 골랐다. 쉬폰 소재의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 내일은 공원에 가기로 했으니까 운동화에 맞춰야겠다. 그렇다면 흰 티셔츠에 청바지? 너무 신경을 쓰지 않은 느낌이다. 연주는 자주 입던 검은 색 조거 팬츠에 눈이 간다. A와 사귄 이후로 이 바지를 입은 적이 없다. A는 치마나 스키니진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A를 만난 뒤로 용돈이 몽땅 옷값에 들어가게 됐다. 화장품도 전과 달리 화사한 색감으로 새로 구매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예뻐졌다고 하니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연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흰 블라우스에 긴 청치마를 고른다. 신발은 스니커즈를 신을 셈이다. 발이 편하면서도 적당히 신경을 쓴 차림으로 보일 것이다. 양말까지 산뜻한 색깔로 고르고 튀지 않는 귀걸이, 목걸이까지 골라 현관 쪽 트레이에 올려둔 후 연주는 자리에 누웠다. 옷을 고르는 데만 3-40분이 소요되었다. 내일은 화장을 해야 하니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A는 연주가 단 한 번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오자 서운해 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연주는 문득 피로감을 느낀다.
핸드폰이 울리자 확인하는데, A다. [잘 들어갔지? 방금 봤는데도 또 보고 십다. 잘 자고 내일 뵈요, 공주님!] 한숨이 나온다. ‘보고 십다’와 ‘뵈요’가 영 거슬리기 때문이다. 연주는 A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응, 오빠. 내일 봬요. 잘 자고.] 담백하게 답장을 보낸 뒤 아차 싶어 하트 이모티콘을 덧붙인다. 뽀뽀를 남발하는 이모티콘이 금세 따라붙는다. 이모티콘 외에 별다른 메시지는 오지 않는다. 연주는 큰 과제를 끝낸 기분으로 한숨을 돌린다.
연주는 다시금 첫 키스를 회상해 본다. 바로 한 시간 전 일인데도 전생의 일처럼 희뿌옇다. A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는 건 하루 종일 느꼈지만 내키지 않아 피했다. 집 앞에 와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A의 얼굴이 다가오자 부담스러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가까이서 본 A의 얼굴은 너무 크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남자친군데,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연주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니까. 외모를 너무 따지는 건 속물 같지 않나? 그러다 연주는 자신이 예쁘게 꾸미고 나갔을 때 헤벌쭉 웃던 A를 떠올린다. A가 느물거리며 연주가 예뻐서 좋다, 라던지 귀엽다, 라는 칭찬을 할 때면 좋다기보다 반발심이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연주는 A의 강직한 성격이 좋았는데, A는 아닌 걸까. 내 안의 특별함을 보지 못한 걸까? 난 특별한 점이 없는 걸까? 하긴... 그나마 A니까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일 테다. 연주는 가까운 과거를 새삼 회고했다.
A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연주가 담배 피는 모습을 보고 B와 ‘겉담배를 핀다’면서 쑥덕거리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러다 순대국밥 집에서 마주쳤을 때는 의외의 모습이라 놀랐다. 평소 후배들에게 소문이 좋지 않은 B에게 망설임 없이 맞서는 모습을 보고 연주는 그에게 듬직함을 느꼈다. 흐릿하던 A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낀 계기였다고나 할까? 그 날 연주는 A에게 번호를 물었고, A가 망설이는 것을 밀어붙여 연애까지 골인했는데... 그 후가 문제였다.
연주는 A에게 설레지 않았다. 첫 데이트를 나가기 전에는 A와 카톡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나름의 두근거림이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길을 걷자 설렘보다는 불편함이 앞섰다. 첫 만남이라 구두를 신었는데 A와 시선이 얼추 맞는다는 것을 느꼈고 입은 옷도 구색이 맞지 않았다. 애써 먼저 A의 손을 잡아도 봤지만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 신경이 쓰였다. 연주는 처음부터 내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A와 만나 온 셈이었다. 그러다 오늘 첫 키스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가까워지는 얼굴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린 바로 그 순간, 연주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오묘한 감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맞서 싸워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연주는 답답한 마음에 고향에 있는 친구, 소희와 통화를 했다. 소희는 평소 남자친구와 다툰 후 고민을 잘 들어주는 연주에게 습관처럼 전화를 걸었다. 소희는 연주의 고민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때마침 오늘 선물을 받았다며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는 정성을 보였다.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사진을 열자 10만원대의 가방이 보였다. 소희의 남자친구는 소희보다 10살 많은 직장인이었고 두 사람은 소희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만났다. 어느 순간 연주와 연주의 친구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는데 두 사람 모두 결론은 “이 좋은 봄에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였다. 소희와 전화를 끊자 연주는 A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다 이렇게 연애하는 거겠지.
잠이 오지 않아 연주는 영상을 몇 개만 보고 자기로 했다. 요즘 연애 유튜브를 많이 봤더니(키스가 싫은데 정상인가요?를 지식인에 물어봤다가 남자로 보이는 답변자에게 날것의 욕을 들은 뒤로 장기 연애 커플들의 영상을 보며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 또 다른 커플 영상이 떴다. 가만히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보는데,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려 여자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홀린 듯이 봤다. 콧대가 그림처럼 유려했다. 반면 여자는... 풀 메이크업을 하면 본인이 이 여자보다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는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유는 본인도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은 10화 특집으로 연주 시점에서 적어봤는데 어떠셨나요?
이번 편을 기점으로 복학생 시리즈는 잠시 쉬어갑니다..
그러나 잊고 살다오면 다시 돌아옵니다 커밍쑨
다음 편은 다른 장르로 찾아뵐게요.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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