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47. 이빨 요정(1)

오늘은 단편 소설 시리즈! 시작합니다🦷

2024.02.17 | 조회 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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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Unsplash, Alexander Grey
Unsplash, Alexander Grey

아빠, 이빨 요정이 뭐예요?”

오늘 너의 앞니가 빠졌잖니. 그걸 베개 밑에 두고 자면 이빨 요정이 동전으로 바꿔 주고, 튼튼한 새 이도 나는 거야.”

우와! 안 자고 있으면 볼 수 있어요?”

 

아이의 순수한 눈동자가 반짝인다. 기대감에 방긋 웃자 비어 있는 앞니가 눈에 들어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그럼, 볼 수 있지, 하며 아이가 덮은 이불을 토닥이자 아이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내려앉는다.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자 금세 평온한 숨소리가 방을 채운다. 고롱고롱 울리는 숨소리를 듣다가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굳게 닫힌 서재 문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닿는다. 아내는 며칠 전, 다시 장편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만 따지면 두 권째다. 그사이에 틈틈이 쓴 단편소설들로 단편 소설집은 다섯 권이나 냈다. 아내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 늘 허허 웃어넘기던 일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온갖 소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늘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방도 따로 쓰기 시작했다.

 

냉장고로 살금살금 다가가 캔맥주를 하나 꺼낸 다음, 다용도실로 역시 깨금발을 들고 나가 최대한 천천히, 살살, 캔을 땄다. 마치 특정 데시벨 이상 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맥주가 흘러 재빨리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면서도 귀는 예민하게 공기를 읽고 있다. 다시 살금살금 거실로 나가 보니, 서재 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다. 이제야 마음을 놓고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이북 리더기를 집어 들었다. 새해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은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 주로 읽는 책은 육아 서적이지만 아내의 영향으로 소설도 조금씩 읽고 있다.

 

여전히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순수한 상상력과 섬뜩한 현실 반영에 놀라곤 한다. 내 아이처럼 이빨 요정을 믿은 게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씁쓸한 맥주를 달게 마시는 어른이 되었으니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늘 재기발랄한 소설을 쓰는 아내를 보면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이렇게 늙지는 않는 게 분명하다. 나는 나의 순수를 어디쯤 놓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안경을 벗고 눈을 꾹꾹 눌렀다. 나답지 않게 자꾸만 센치해진다.

 

요즘 읽는 책은 이빨 요정과 한 소년의 모험을 다룬 성장 소설이다. 이빨 요정은 그냥 새 이를 수금하는 게 다인 줄 알았는데, 마치 수호 요정처럼 소년을 지켜주는 것을 보니 역시나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모양이다. 간혹 아내가 쓴 소설을 내게 보여준 적도 있었는데, 10장짜리 소설을 읽는 내내 아내는 옆에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가 물을 한 잔 마시기도 하다가 초조하게 내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나는 사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어서 아내는 예사롭게 눈치를 채곤 했다. 어느 순간 아내는 자신이 쓴 소설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고 거리감을 다시 좁히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예사 직장인 남편들처럼 집에 오면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고 아이가 방긋 웃어주길 바랐지만, 아내는 집안일을 꼼꼼히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Unsplash, Steve Pancrate
Unsplash, Steve Pancrate

어느 날은 회식 후 늦은 귀가를 하다가 불 꺼진 식탁에 아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아내는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음울하고 기괴한 뒷모습이었다. 실은 회사 남선배들의 조언으로 부러 늦은 귀가를 자주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아내의 지친 어깨를 보고 오랜만에 어떤 감정을 느꼈다. 부끄러움. 아내의 작은 어깨에 무슨 짐을 지우고 있었던 걸까. 나는 부끄러웠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긴 휴가를 냈다. 2주 동안 아내는 잠시 시간을 멈추었다. 아내가 집을 비운 동안 나와 아이는 투쟁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 아이와 가장 친한 유치원 친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 등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침을 먹이고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집을 치우고, 겨우 밥 한술 뜨고 짬을 내 소파에 몸을 부려 놓으면 여지없이 아이 하원 알람이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오면 또 밥을 먹이고, 놀아주고, 겨우 재우고 나면 엉망이 된 집을 살금살금 치우고,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고. 밤이 되면 핸드폰을 볼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이런 하루하루를, 아내는 아이가 기고 걷고 뛰어다니는 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5일째 밤, 나는 눕자마자 아이 울음소리에 일어나다가 아내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얼마나 무심하고 또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보름의 휴가를 주었음에도 일주일 만에 산뜻한 얼굴로 돌아온 아내를 말없이 와락 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내는 피식, 김새는 소리를 내며 내 등을 토닥였다. 금세 아이도 달려와 우리 사이를 비집고 애교를 부려, 우리 부부는 또 맑게 웃어버렸다.

 

고작 보름 동안, 아내는 기가 막힌 장편소설의 초안을 작성해 냈고 아이를 낳은 후 출간한 단 한 권의 단편집이 화제가 되어 영화, 드라마 제안을 한 번에 받았다. 아내가 진지한 얼굴로 식탁에 마주 앉아 말해준 계약금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충격을 받을 정도?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쉬이 꿈꾸기 어려울 액수였다. 내 지난 10년을 돌아보았다. 몇 번의 이직을 거쳐 제법 괜찮은 연봉 계약을 하고 지금 회사에 다닌 지 2년째. 못난 이야기지만, 집에서 혼자 일을 하며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아내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아이의 보채는 소리에 재빨리 아이 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뒤통수를 보며 스스로가 참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불현듯 퇴사를 결심했다.

 

 

 

 

 

주말이 되어서야 띄워드리게 되었네요.

이번 주도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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