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11. 쓸쓸이 나를 관통한다

시세이(시+에세이)의 날! 빗소리를 들으며 읽기 좋은...☂

2022.08.17 | 조회 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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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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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이 나를 관통한다

이 문장은 가지를 뻗지 못하고 숱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여전히 너를 생각하는 중이다 나의 쓸쓸은 곧 네가 세상에 내보이는 석 자의 찬란임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깨달을 때면 그대로 스러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영영 네가 나의 쓸쓸이라면

내가 아는 유일한 영원은 너를 향한 애달픔이라

 

이 시는 사실 술을 마시고 썼다.

내가 술을 마시고 쓴 것 중에 거의 유일하게 오롯이 살아남은 글이다. 이 시는 진 토닉 한 잔, 모히또 한 잔, 맥주 한 병을 마신 뒤 무알콜 모히또(숙소에 제 발로 찾아가기 위함) 한 잔을 마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작년 여름의 일인데, 혼자서 떠난 두 번째 여행이자 혼자임을 철저하게 만끽한 첫 번째 여행이었다. 장소는 여수였고, 제주에서의 보름살기는 상당한 외로움을 동반했다면 여수에서의 일주일은 아주 자유로웠다. 신발 할인점에서 산 저렴한 쪼리를 끌고 여수 곳곳을 누볐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고 살가웠던지 당시 다니던 회사 직원들-안 친했음-에게 줄 기념품까지 구매했다. 아주 비싼 것을 구매한 것은 아니나 완벽한 일주일에 술처럼 취해서 한 충동적인 구매였다.

그러나 좋았다. 유명한 여수 밤바다노래를 안주 삼아 숙소 옥상에서 캔 맥주를 마실 때에도, 머나먼 목적지를 향해 엉덩이마저 들썩거리는 험한 버스를 한 시간 동안 타고 갈 때에도, 무척 기뻤다. 혼자 만끽할 수 있는 여유로움에.

 

  Photo by Glen Carrie on Unsplash
  Photo by Glen Carrie on Unsplash

그럼에도 가끔, 당연히 외로웠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에 관통 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은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진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터널을 앞으로도 겁 없이 걸어야만 할 거라는 어떤 깨달음. 굳이 이름 붙이자면 나를 관통한 화살의 이름은 쓸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를 겨눈 그 어떤 무기보다 날카롭고 또 동시에 따뜻했다. 평생 따돌리지 못하고-고작 30년 살았지만- 나를 내주어야 했던 쓸쓸이, 외로움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쓸쓸의 뒤통수에 해방과 자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늦게 혹은 제법 일찍 깨달은 셈이었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누구를 그리워했던가.

언제부턴가 내가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다시 말해 이 시의 뮤즈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나간 기억은 죄 흐릿해졌고 그런 것이 없어도 간혹 시는 써졌다. 마구잡이로 흘러넘치지 않을 뿐, 이따금 제법 괜찮은 시구가 튀어 나왔다. 그럼에도 이 시를 쓴 날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오래 생각했다. 오래오래 낙서를 끄적거리고 우두망찰한 결과 영영나의 쓸쓸이 될 사람은 단연코 나 자신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나온 시절의 나에게, 꿋꿋이 터널을 걷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나는 쓸쓸과 애달픔을 품는 사람이 되었다. 예기치 못한 결말이다.

지난 연휴에 나는 확실히 행복하지 않았다. 무기력증이 몰려와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그 와중에 잔뜩 쌓인 것들을- 모른 체하고 누워 있었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물에 가만히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물은 무척 깊다는 것을. 언제든 내 발목을 움켜쥐고 무자비하게 끌어당길 생명체가 맴돌고 있다는 것도. 그 생명체 역시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이라는 것도. 이러니 나는 갈수록 사랑이라는 단어에 어지럼증을 느낀다. 측정할 수 없이 깊고 진창처럼 눅진하고 솜털처럼 가벼운 것. 모두 다 아닐지도 모르는 것.

어쩌겠는가? 사랑은 세기의 현인들조차 정의내리지 못한 단어인데. 고작 30년산인 인간이 정의를 내리기에는 심히 버거운 상대가 분명하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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