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17. 복학생(5)

한 주 쉬고 돌아온 복학생! 오늘은 분량이 제법 됨!💥

2022.10.05 | 조회 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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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A는 퍼뜩 놀라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뭐지? 혹시 영화에서나 본 그런 상황? A는 내심 기대를 품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헤 벌리고 정신없이 잠에 빠진 B가 보였다. A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방비 상태인 B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가뜩이나 어제 술도 많이 마셨는데,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저 멀리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집으려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뒤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B가 어느 새 일어나 A의 엉덩이를 보고 웃는 중이었다. B 또한 지문이 잔뜩 묻은 안경을 대충 걸치며 인상을 쓴 채 돌아보는 A의 얼굴을 보고 정색을 했다.

 

- 형, 진짜 못생겼다.

- 네가 할 말이냐?

- 아니 정말... 어제도 느끼긴 했는데, 새롭게 못생겼어.

- 미친 새낀가?

- 아... 근데 어제 진짜 많이 마셨다. 형, 속은 괜찮아? 내가 말 놓기로 한 건 기억하지? 형이 놓으라고 했다?

- 어, 기억해. 머리 울리니까 닥쳐 봐.

 

만담이라도 하듯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픽, 웃는다. A는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고, B는 곰팡이가 핀 천장을 보며 생각한다. 저 형보다는 내가 낫지. 아침 얼굴 살벌하네. 시간은 오전 95. 두 사람이 함께 듣는 전공 수업이 시작한지 딱 5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두 사람은 5분가량을 더 고민하다가 어차피 교수님이 출석을 불렀을 것이 분명하며, 어차피 점수도 깎였는데 자체 휴강을 하며 해장을 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도 훨씬 이성적인 선택이라는 극적 합의를 보았다. 이어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순대국밥을 시키려다가 이제는 배달 비가 삼천 원까지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둘은 억지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대학가의 유명 순대국밥 집으로 향했다. 삼십 분 가량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순대국밥 집에 앉은 둘은 참지 못하고 소주를 한 병 시키고 말았다.

 

- 이제 배달비는 삼천 원, 소주는 사천 원이네.

- 와, 물가 개 비싸네. , 형 새내기 때는 소주 얼마였어?

- 야, 나 너랑 한 살 차이거든? 어린 척 미쳤네.

- 형~ 한 살 차이가 얼마나 큰데. 난 여자 후배들이랑도 개 친해.

- 야, 나도 한 번 불러주면 안 되냐?

- 뭐래.

 

결국 A는 작은 사이즈의 피순대를 추가로 시키고, 순대국밥과 소주까지 계산한다는 전제로 B와 여자 후배들의 술자리 초대권을 획득했다. A는 난데없이 건방져진 B가 언짢지만 여자 후배들과의 술자리를 생각하니 조금은 꿈을 꾸는 기분이다. 혹시 겉담녀도 나올까? A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녀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통성명을 하고, 나를 보고 싱긋 웃는 얼굴을 보고, 용기 내어 데이트 신청을 하고, 둘이서 밥을 먹고, 어쩌면 둘이서 술을 먹고... 너무 상상력이 뛰어난 탓인지 A는 그만 겉담녀의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까운 테이블에서 이 시간에 혼자 소주를 시켜 순대국밥을 먹는 모습으로. 내가 상상한 건 파스타 집인데? A가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자 이상하게 느낀 B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얼굴이 환해지더니 A의 환영에게 손을 흔든다.

 

- 어! 안녕!

 

heart love GIF by Flighthouse (GIPHY)
heart love GIF by Flighthouse (GIPHY)

A는 자신이 보던 것이 환영이 아님을 깨닫고 그만 숨고 싶어졌다. , 오늘 상태 별론데... B는 무슨 자신감인지 냉큼 일어나 겉담녀에게 다가간다. 겉담녀는 A의 눈에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B를 불편해 했다. B나 네 선배인 거 알지, 너희 학번 지은이 아니, 나 내일 솔이랑 술 먹을 건데 너도 와라, 너 연진이랑은 안 친하던가? 근데 너 내 이름 알아? 내 이름은 B고 오빠라고 불러, 너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혼자 밥을 왜 먹냐, 다음에 오빠랑 밥 먹자 등의 말을 쏟아내는 동안 겉담녀는 소주잔을 들고 있던 손을 애매하게 테이블에 얹어 두고 소주병만 빤히 보았다. 막 마시려다가 방해 받은 건지 투명한 소주가 찰랑이며 테이블로 몇 방울 떨어졌다. 겉담녀는 소주잔을 소리도 내지 못하고 테이블에 두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A는 그 괴로워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겨우 용기를 내어 겉담녀의 테이블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냥 어려움에 처한 후배를 도와주려던 것뿐이었는데, 가까이로 가자 B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새끼 진짜 빡쳤나? A는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B의 얇은 팔뚝이 눈에 들어오자 딱히 두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야, 뭐 하냐?

- 아, . 얘 걔잖아.

- 뭐가? 괜히 후배 괴롭히지 말고 밥이나 먹지?

- 여자 앞이라고 센 척 하는 거 봐라, 개 웃기네?

 

B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A는 순간 욱 했지만 괜히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그는 평화주의자니까... 절대 싸움이 두려운 건 아니다- 한숨 한 번 크게 쉬어주고 B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겉담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미안해요. 제가 낼 테니까 편하게 먹고 가요.

- 아... .

 

겉담녀가 동그란 눈을 뜨고 자신을 보자 A는 쑥스러움과 뿌듯함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유난히 남자애들을 못살게 굴던-매일같이 무거운 짐을 들게 하며, 힘든 청소 역시 전부 남학생들 담당이었다. 이토록 불합리할 수가- 여자 담임에게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비판을 가했을 때, 반 남자애들이 자신에게 의외라는 듯 환호를 보냈던 바로 그때처럼. 떠올리다보니 A는 그 담임이 결혼은 했을지 궁금했다. 그 깐깐한 성격에, 아마 못 했겠지. A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건 겉담녀가 본인의 핸드폰을 A 앞에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 저희 과 선배시죠? 번호 좀 주세요.

- 에?

- 선배님 번호요.

 

웬일인지 겉담녀의 표정이 온화해 보여 A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되고 있다?

 

 

 

복학생(6)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로, 복학생 시리즈는 생각보다 더 깁니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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