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쓰지 않는 날이 늘수록 글쓰는 게 점점 두려워진다. 그럴수록 나는 책에 파고드는데, 어쩔 때는 다른 작가들이 쓴 글이 너무 뛰어나게 느껴져서 두려움이 더 커질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채식주의자, 흰,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감탄했고, 또 감탄하다가 나는 과연 소설가의 자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우울해졌다.
- 맞아. 그의 말대로 난 뭐라도 해야하는데, 마음이 너덜거린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
- 내 삶은 대부분 감정의 격동으로 채워져있었다. 때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언제까지 이런 격동을 감내해야 할까, 언제쯤이면 평온하기만 한 날들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고 기다려왔다. 격동이 심해질 때마다 나는 '살아있어서야.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야.' 하며 다독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 버거워서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도 모르는 산 속 어느 절에서 속세와 단절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겁쟁이여서 단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행동으로 옮겨본 적은 없다. 아무래도 나는 겁쟁이가 맞다.
- 언제나 사랑받아 마땅할 거라는 오만과 착각이 칼과 창이 되어 방패 없는 등 뒤로 내리 꽂힌다.
-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거지? 라는 생각은 사실 자만에 가깝다. '나만'은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돼, 내게는 절대로 좋은 일만 존재해야 해! 하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 총대를 매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너무 타인 위주로만 행동해왔던 내게 돌아온 말은 '좀 더 약은 사람이 되었어야지. 넌 너무 물러서 그래.'라는 말들이었다. 약은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왜 계산적이고, 약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바보'같다는 말을 들어야하지? 아무리 그런 말을 들어서 약간의 상처를 받았다고 한들, 나는 절대로 나의 그런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과응보는 반드시 존재하며,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며, 세상에게 내가 내보낸 것은 결국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좀 무른 인간일지라도, 고여서 썩은 인간이고 싶지는 않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걷는다. 날이 맑든, 흐리든,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걷는다. 그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단지 태풍이 불 땐 몸을 어딘가에 숨기고, 날이 맑을 땐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안다.
- 걷다보면 종종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순간들이 있다. 돌 틈에 피어난 꽃들, 붉고 노랗게 물든 나무들, 나뭇가지 위 위태롭게 쌓인 눈,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흰 나비의 열정적인 춤 사위를 보는 것과 같은 순간들.
-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항상 존재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것.
- 아무도 만나지 않는 삶과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삶 중에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 삶이 내게 준 굴곡이 없었더라면, 밋밋하고 평탄한 삶만이 내게 주어져 있었더라면 내 글은 자연스레 삶과 닮아있을 것이고, 글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가닿을 수 없으리라.
- 남편의 품에서만 맡을 수 있는 포근하고 안정적인 향, 요가하며 흠뻑 쏟아낸 땀,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쓴 모닝 페이지들,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지해주는 동생과 오랜 친구들,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종종 하는 명상. 나를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들에 관하여.
- 나는 역시 글을 씀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낀다. 불안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굽어있던 어깨가 서서히 펴짐을 느낀다. 글은 안정제이자 치료제이며,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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