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키가 더 이상 컴플렉스가 아니게 된 건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고부터다. 언제나 내 키는 컴플렉스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맨 앞자리 혹은 그 뒷자리를 고수하게 된 건 5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줄곧 놀림을 받기도 했는데, 한 번은 고등학생 때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야. 150cm 안되면 장애인이라던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하는 그 아이의 말은 스무살 후반까지도 계속 상처로 남아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웃었고 집에 가서는 엉엉 하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그 기억을 떠올리면 좋지 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후에도 키가 작아서 상처가 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한 가지의 기억만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옆에는 키가 아주 큰 여자 아이들이 웃으며 지나갔고, 나는 그녀들이 하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야. 쟤 키 진짜 작다. 야 야 옆으로 가봐. 키 차이 얼마나 나나 보게."
그 말을 들은 순간, 즐거웠던 친구들과의 모임은 지옥으로 변했다. 친구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내 표정을 보며 심각해졌고, 어렵게 꺼낸 내 얘기에 더 격분했던 나의 친구들은 직접 찾아가 따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나가자고 했다. 그 기억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 나는 더욱 위축되고 소심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연애를 할 때도, 면접을 볼 때도 잘 되지 않으면 무조건 내 키나 외모 탓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내가 키가 큰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시작된 쓸모없는 생각들은 서서히 나를 갉아먹었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보였지만 몸과 마음은 급격히 시들어갔다.
2.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자각하기까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외부 세계에만 시선을 두었고, 나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던 내게 한꺼번에 고통과 시련이 쏟아졌다. 일도, 사랑도, 인간 관계도, 가족도 어느 하나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은 것들이 없던 해였다. 나를 지키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나는 폭음과 폭식에 온전히 나를 내맡겼고, 결과는 처참했다. 키 148cm에 60kg 까지 찍은 나는 한 인간의 육체라기보다 거의 납작하고 둥근 동그라미 같았다.
3.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아무랑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고, 그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매일 거울 속 처량한 내 모습을 보며 울고 또 울었다. 고독 속에서 나는 살기 위해 일기를 썼고, 글을 썼으며, 수 년 간 읽지 않았던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혼자 있으니 할 게 그런 것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선택한 일들이 두꺼운 알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처참해진 나를 들여다보는 글을 썼다. 이런 나라도 나는 '나'다. 수 십 년동안 나는 '나'와 함께 해왔다. 내 옆을 언제나 지켜주고,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나' 자신이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나와 대화할 시간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까.
4.
그렇게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의도치않게 많이 가지게 됐다. 나는 나와 대화하며 생각보다 괜찮은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와 대화할수록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외모, 돈, 직업, 모든 걸 다 떠나 나라는 인간, 그 알맹이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신감이 솟구쳤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타인을 웃게 만드는 걸 가장 기쁨으로 여기며,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5.
온갖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 속에 빠져 잊고 있었던 '꿈'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6.
등 떠밀어서 억지로 하고 있는 내 직업 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나의 삶이 어떤 건지에 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한 삶.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삶. 그리고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삶이었다. 언제든 시간 내어 고향에 있는 친구들을 보러가고, 라멘이 당기는 날이면 주저 없이 일본으로 날아가 라멘 한 그릇 먹고 돌아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 누군가의 압박이나 명령에 시달리지 않는 삶.
나의 글과 그림을 통해 누군가가 행복을 느끼고 웃음 짓는 삶. 그렇게 직업과 '나의 일'을 병행하며 살아온 지 어연 5년이 다 되어간다. 내 삶에 집중하고, 나의 내면에 집중하며 살기 시작하자 내 키가 148cm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나는 위축되고 소심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이제는 누가 키가 작다고 해도, 누군가가 킥킥 웃으며 나와 자신의 키를 비교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런 상대방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자신의 어떤 불행 때문에 타인을 저렇게까지 낮추려고 할까. 하는 생각.
7. 키는 바꿀 수 없지만, 내면의 나는 얼마든지 가꿀 수 있다. 그렇게 내면의 힘이 강해지고, 비로소 나만의 가치관이 성립될 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외부의 어떤 것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 힘이 생긴다. 비록 내 키는 148cm지만, 삶에 대한 열정은 2M 남짓인 나는 옛날만큼 세상이 두렵지 않다. 두려움은 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마주해보면 안다. 나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꽤 괜찮은 존재인가를. 그러니 누구든 자신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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