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문 마지막 회를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을 느끼고, 각종 로봇 애니메이션을 보며 나도 언젠가 로봇을 운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요? 요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무서워하면서도, 요괴를 무찌르는 주인공처럼 나도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 잡혀 본 적이 있나요? 언젠가 웨딩 피치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네. 그렇다면 저와 당신은 같은 '오타쿠'입니다. 반갑습니다. :-)
한번쯤 색다른 인사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오타쿠가 아닐지라도, 저는 확실히 '애니메이션'분야에 있어서는 오타쿠가 맞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된 지금도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웃기도, 울기도 하니까요. 여전히 마음 속 어린 아이는 변함이 없나 봅니다.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속 어린 아이를 잃었을 때, 대개 삶은 불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최근에는 '귀멸의 칼날'에 흠뻑 빠져 몇 날 며칠을 새벽 늦게 잠에 들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주행 중에 있다는 건 아마도 TMI겠지요. 귀멸의 칼날은 첫 편부터 어마무시한 시련과 고통을 겪는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를 보여줍니다. 혈귀라는 무시무시한 요괴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과 혈귀로 변한 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주인공은 멀고도 고된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귀멸의 칼날은 그저 요괴를 무찌르는 무협 애니가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저는 무협 스타일의 영화나 만화를 그닥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흥미가 없었고, '칼날'이라는 단어 자체가 왠지 단순한 무협 애니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주인공인 카마도 탄지로는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내면은 강한 인물입니다. 그냥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정하면서도 강함'을 가진 인물이지요. 그야말로 외유내강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거부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존경을 표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압니다. 심지어 혈귀까지도요. 물론 아무런 죄 없는 인간을 죽인 혈귀를 단칼에 베어내기도 하지만, 혈귀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그 어떤 등장인물도 하지 않는 '성불하십시오'를 외치며 기도를 합니다. 혈귀도 한 때 약하고 사랑받길 원하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해주는 유일한 인물인 것이지요.
탄지로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잘 보여줍니다. 가족과 형제의 우애, 친구와 동료의 우정, 용서와 배려, 무한한 사랑, 시련 속에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을 정말 세세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로 잘 풀어놓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고전 소설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더 배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책을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지만, 애니메이션만이 줄 수 있는 생동감이 있으니까요.
귀멸의 칼날 뿐 아니라 나츠메우인장, 이누야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제게 영감을 주고, 더 나은 태도로 살아가게 하는 데에 애니메이션은 커다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얼마 전 본 '엘리멘탈'도 마찬가지고요. 애니메이션은 잃어버린 것 같았던 동심은 여전히 제 안의 깊숙한 곳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인공들이 크고 험준한 산을 혹은 고비를 넘길 때마다 저도 함께 성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제가 고비를 넘고 있을 때마다 이상하게 책보다는 애니메이션에 기대게 되더라고요. 정말로 마음이 힘들면, 책을 집중해서 읽기가 어려워서일까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있으신가요? 아니면 꼭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내가 '오타쿠'가 될 정도로 무언가에 흠뻑 빠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해보려 이것저것 조금씩 해보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좋아하는 게 없으면, 질겅질겅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하루만 계속 된다면 그것은 곧 슬픔이 무기력으로 변한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작은 즐거움이라도 주는 무언가를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요. 그게 만화든, 웹툰이든, 신나는 게임이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그림을 그리든, 뭔가를 만들든 간에 그냥 내가 재밌으면 되는 거에요.
얼마 전 퇴사를 한 후,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굉장히 힘든 날들을 보냈는데요. 단순히 흥미로 보게 되었던 '귀멸의 칼날'이 이렇게 제 상처를 치유하는 '칼날'이 되어 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인생은 늘 예기치 않은 것들로 가득한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로 위로받고, 다시 밝은 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이란, 늘 한결같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행복만을 바라게 됩니다. 끝없이 행복만이 이어진다면 그 행복을 '행복'이라 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슬퍼도 곧잘 잊고, 더 힘차게 일어서던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려봅니다.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를 만든 거니까요. 누군가는 오직 현재와 미래만을 떠올리라고 하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입니다. 과거의 저도 충분히 좋고 멋진 모습이었으며,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안의 순수함과 호기심을 부디 오래도록 잃지 않으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독자님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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