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외갓집에 갔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자고 일어났는데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했고, 닫힌 문틈 사이로 보이는 흰 빛이 환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문 바깥으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가자 친척들은 나를 거들떠보는 둥 마는 둥 윷이여 모여 떠들썩하게 윷놀이를 하고 있었고 몇 초 뒤에야 나를 발견하고 돌아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신생아기가 잠투정하는 건 잠을 죽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 있다. 엄마와 분리되는 것, 그것이 극한의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물체가 어떤 것에 가려서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대상영속성’은 돌 즈음에서야 형성된다.
성인이 되어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딘가에 있다’라는 걸 아는 것과 ‘내 앞에 없는 것’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까꿍, 하고 말하던 목소리도 얼굴을 가린 손바닥도 멀어졌다. 1초 사이에 내비치던 얼굴의 간격도 멀어졌다. 대상영속성. 그걸 알게 되었으니까, 기다릴 수 있고 참을 수 있고 어른스러워져야 하는 성인이 되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유독 긴 시간 속에서 나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울었던 것일까. 이곳이 현실이라 안도해서 울었던 것일까. 나는 깊고 깊은 죽음에서 돌아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억울해서 울었던 것일까.
가끔은 반대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꿈에서 빨리 깨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 꿈은 길고 길었노라고, 당신들 여기서 능청스럽게 재밌게 잘 놀고 있었구나, 와락 안기며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꿈이든 현실이든 그리운 사람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을 만날 땐 그 순간이 꿈에서 깬 순간이다. 짧은 죽음을 경험하고 난 뒤에 겨우겨우 눈을 뜬, 내가 살아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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