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같아.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툭 튀어나온 말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발음해보는 이국의 단어처럼 천천히 한 번 더 되뇌었다. 정말 거지 같군. 다른 말로는 달리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몇 번 더 중얼거렸다.
거지,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
너덜너덜해진 기분과 화로 가득 차 내가 소중히 여기는 마음들이 도리어 가난해진 상황, 남에게 빌어먹어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럴 땐 차라리 회피하는 게 낫다는 걸 안다. 시간이 지나야 물밑으로 가라앉은 침전물을 볼 수 있다. 그 장면은 소리 없이 더디게 진행되므로 고요함을 품고 있다. 그래, 그냥 덮어두자. 하루가 지난 지금,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처럼.
차를 우릴 때 100도가 아닌 90~95도의 물을 사용한다. 차를 우리는 동안 그 물은 조금 더 식어서 뜨겁진 않지만 따뜻한 것 보다는 조금 더 뜨거운 상태가 된다. 그 차를 마시면 몸이 데워지고 때로 마음까지 데워진다. 그 온도는 팔팔 끓기 직전,일 수도 있고 팔팔 끓고 난 다음 조금 식힌 이후,일 수도 있다.
분노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기 전에 정지하는 것도 좋지만, 90퍼센트의 분노나 100퍼센트의 분노는 비슷해 보인다(그리고 무엇보다 쉽지 않다). 다만 100퍼센트의 악감정을 가졌더라도 그 감정이 휘발되고 10퍼센트의 새로운 바람으로 채워진 90퍼센트의 분노나 화는 앞으로 더 수그러들 가능성이 보인다.
뜨거운 기운이 한결 간, 그래서 적당한 뜨거움을 담은 찻잔을 보듬고 싶어서, 그러면 덩달아 전해지는 온기로 차분해지고 싶어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찾아 읽고 듣고 적는다.
예컨대, 외부 권위나 평가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동기부여 하는 자발성, 환경이 완벽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단 해보는 실행력,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고 수정하는 유연함과 회복 탄력성을 공통적으로 발견한다고 말하는 황선우가 다른 세대(타인)와 일하는 자세,
나이가 들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생기고 차마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도 생긴다는 말. 그런데 그게 괜찮다는 말. 그건 모두 내가 살아있어서 그런 거라는 황정은의 일기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장 김처럼
얇고 바스락거릴 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을 땐,
한 김 식은 따듯한 밥을 품자
돌돌돌 말면
부서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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