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후]김일두, 테스형 말고 일두형

'추후'의 뉴스레터

2021.03.25 | 조회 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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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우리는 서른살이 됐고,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영화 <9월이 지나면>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형이라는 호칭은 내 나름대로 존경의 표시야, 아무나 형이 될 수 없어" 

영 성미에 맞지 않지만 그동안 피 한 방울 안 섞인 수많은 형들을 만들어 왔던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아 그렇지 형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영화 <9월이 지나면>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9월이 지나면> (출처 : 네이버 영화)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부러지기 쉬울 정도로 치기 어린 고집들이 있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아무에게나 형의 호칭을 주고 싶지 않았다. 속내는 그랬으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오래된 호칭에 감히 대들 정도의 용기도 없었다. 다만 속으로 진정한 형들을 내 나름대로 구분해 놓을 뿐이었다.

살면서 형이라고 부르고 싶고, 동경하고 존경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나도 진정 형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아주 가끔, 몇몇 사람이 존재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일두형이었다.

사진 출처 : 더 위키
사진 출처 : 더 위키

 

기억을 되짚어 일두형의 노래를 가장 처음 들었던 건, 군인 시절 세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휴가를 나오면 꼭 한 번씩은 만나던 와타나베 형이 (나 혼자서 지어준 별명이었고, 몇 안 되는 '그' 형이었다) 노래를 추천해줬고, 여느 때와 같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가 일두형의 "문제없어요"라는 노래였다.

그때에 나와 형은 각자의 이유로 크고 작은 문제들을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불필요한 걱정들의 크기를 줄여갈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문제없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랑에 관한 노래였지만,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어주는 노래이기도 했다.


그게 나의 마음.

당신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담배뿐 아니라 ROCK N ROLL도 끊겠어요.

번 버스 타고 특수용접 학원에도

지하철 타고 대학입시 학원에도 다닐 거예요

그대가 날, 사랑해 준다면

<문제없어요>, 김일두 노래 가사 中


투박하고 묵묵한 목소리에 담긴 노랫말을 듣다 보면, 정말 어떤 것이든 '문제없다'라는 기분이 들었다. 일두형의 목소리는 뭐랄까 형들의 형, 큰형의 목소리였다. 일두형의 노래에는 그런 기운이 있다. 노련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그래서 꼰대 같지 않은, 진심 어린 말들. 담백하고 다정한.

대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일두형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때는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두가 가난해 보이던 때였다. 다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하고 싶은 건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혹시나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 불안했다. 그때에 그런 불안감을, 일두형은 노래를 통해 또다시 다독여주었다.


진우 녀석은 김신애랑 찬율이랑

며칠 전에 왔다 갔다오.

상민이 놈은 맨체스터에

뿌려졌단 얘길 들었소

케이시 맥키버 지네 고향에서

대단한 글쟁이 되어

가발 사업이 어쩌구 저쩌구

가발 신제품 가끔 보내요

스티브 놈은 해운대에다

근사한 카지노 하구요

민호 녀석은 커밍아웃해

훈무랑 결혼해 잘 삽니다

막내 창완이 얼마 전에 딸 낳아

징징 짜며 전화 왔구요

같이 징징 짜는 내게,

범어사 최대 미녀

가지를 맛있게 볶아 줬어요

우리 무조건 행복하자구요 

<가난한 사람들>, 김일두 노래 가사 中


비록 쥐뿔도 없고, 내내 불안하지만, 살다 보면 결국 모두 잘 지낼 것임을,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모두가 행복하면 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노래였다. 그리고 역시 지금, 나와 내 친구들은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

그렇게 나 혼자서 좋아하던 일두형을 실제로 마주했던 적이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하는 사촌 누나가 진행하는 작은 영화제의 엔딩 무대에서였다. 일두형은 회사는 절대 안 다닐 것 같은 차림으로, 허구한 날 기타만 두들기는 삼촌 같은 모습으로, 어리숙하게 무대 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타 하나만 가지고서 덤덤하게 노래를 불러갔다. 

일두 형은 무대 중간중간 괜한 멘트들을 애써 채우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들이 나에게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져 어딘가 안심이 됐다. 그런 면에서 그 공연은 예전 광석이 형의 공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연을 마치고서 일두형은 딱히 갈 곳 없지만, 어디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떠나갔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일두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돌 팬클럽에 가입해 본 적도 없는 나에게 이상한 팬심 같은 것이 자리 잡았다. 뭐랄까, 저 형이 밥 좀 잘 챙겨 먹었으면 좋겠고, 어디서든 건강히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꼭 어딘가에서 만나 오랫동안 술 한잔하고 싶다는 느낌. 

나훈아에게는 테스 형이 있고, 나에게는 일두형이 있다. 또한 모두 각자의 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어떤 사람의 형이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누군가의 진정한 형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모든 진정한 형들의 간이 오랫동안 건강하길 바란다. 이 형들은 왜인지 다들 술을 너무 좋아하니까.


글쓴이: 호모루덴스

소개: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맛있게는 해줍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 네 명이 모여 글을 씁니다. 영화/라이프스타일/문학(시, 에세이, 소설)/음악에 관한 글을 매주 [월/화/수/목]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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