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다 실어 놓고 운전석을 바라보자 용달 트럭 기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짐칸을 살펴보는 눈치였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거울 하나를 더 실어 놓아서 그런 거겠지’. 괜히 민망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어 멀쩡한 거울을 다시 내려놓으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말리며 트럭 기사에게 슬쩍 다가갔다.
아버지는 창가에 기대어 요 근래 경기가 어찌나 힘든지, 날씨는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가만 들어보니 ‘짐 하나만 더 실읍시다’라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것이었다. 결국, 기사는 마지못해 “그냥 실어 놓으셔”하며 말을 바꿨다.
사람 좋은 웃음과 말 몇 마디로 돈을 아끼는 건 아버지의 오랜 재주였다. 반면에 나는 얼굴을 붉히는 것이 싫어 돈을 더 내거나, 멀쩡한 것을 버리고 가는 편이었다. 아버지와 나의 방식은 달랐고, 나는 늘 나의 방식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는 오래된 동네에 도착했다. 어딘가에서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 두 번 땅을 짚는 소리 뒤에 늘 상 그래 왔듯 발을 끄는 소리도 딸려왔다. 밖을 내다보니, 이웃집에 사는 노인이 보였다. 투박하게 깎아놓은 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참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 나는 새삼 집으로 돌아온 것에 실감이 났다.
어렸을 적에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도 함께 살았었다. 시골에서 밭일하던 할머니는 갑작스레 뇌졸중이 찾아와 쓰러졌고, 그 일로 후유증이 남은 할머니는 몸 한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친척들은 모두 갑작스레 생긴 부양가족을 난감해했다. 가족 모두가 모인 자리에는 부담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이내 교육시켜야 할 자식들이나, 새로 받은 대출금 같은 각자의 사정들이 겨루듯이 꺼내졌다. 결국 둘째였던 아버지가 나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무로 지팡이를 깎아 만들었다. 할머니는 매일 그 지팡이를 쥐고서 집 앞 골목을 걸어 다녔다. 후에 고모들이 칠순 선물로 고급 지팡이를 사 왔지만 할머니는 아버지가 깎아 놓은 지팡이만을 사용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유일하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버리지 않고 계속 보관했다.
커다란 침대 부속을 2층으로 옮겨 현관 앞 복도에 다다르자 대낮인데도 훤히 켜져 있는 형광등이 보였다.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 등도 아니고 그냥 내내 켜져 있는, 실내에서나 쓸 법한 등이었다. 저건 뭐냐고 묻자 “밤에 어두우니, 네가 온다 해서 달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촌스럽게 센서 등도 아니고 뭐 저런 걸 밖에 달았냐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으레 그 사람 좋은 웃음만 보이고서, 대답이 없었다.
내가 지내기로 한 방은 원래 아버지가 서재로 쓰던 방이었다. 양쪽 벽에 가득했던 나무 책장을 작은방으로 옮겨 놓자 좁아 보이기만 했던 방이 적당히 넉넉해졌다. 하지만 책장 하나가 오갈 데 없어졌고,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는 그 책장을 방문 앞에 두기로 했다. “괜찮으냐? 방에서 나올 때 불편할까?” 나는 여러 번 방문을 열어 보이며 “상황이 괜찮아지면 다시 나가서 살 텐데, 어디에 두든 상관없어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상황이 좋아져도, 기왕이면 같이 지내는 것이 좋지.”라며 기울어진 책장 밑에 여러 겹 겹쳐놓은 장판 조각을 끼워 놓았다. 그러자 흔들거리던 책장이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침대를 설치하고 짐들을 모두 정리하자,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전에 쓰던 블라인드를 창문에 달아 놓으려 했다. 하지만 전에 살던 집의 창문 사이즈에 맞춰 주문했던 것이 옮겨온 방에서는 역시, 제대로 맞질 않았다. 결국 나는 창밖의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채로 창문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먼저 잠이 들었는지, 안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았다. 나는 방문을 닫고 불을 끄고서 침대에 누웠다. 잠시 한숨을 돌렸지만 혼자 지내던 버릇이 남아서인지, 몸이 피곤한데도 잠이 쉽사리 오질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무언가 막막한 기분이 찾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고 싶단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어두워졌다. 창 밖 복도의 형광등이 꺼진 것이었다. 그리고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와 오른손으로 어두운 벽면을 훑었다. 전등 스위치가 몰려있는 곳에 손이 닿았고, 이내 거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어떤 것이 거실의 스위치 인지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매직으로 투박하게 써놓은 ‘센서등’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 스위치를 누르자, 베란다 밖 형광등이 켜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의 불투명한 대형 창문 너머로 복도 밖 뿌연 불빛이 아른거렸다. 무언가 켜지는 순간이었고, 그제서야 나는 선명해졌다.
글쓴이 : 호모루덴스
소개: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맛있게는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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