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짓고 노래를 만드는 사람
‘생각의 여름’은 박종현(84년생)의 1인 프로젝트이다. 생각의 봄 ‘사춘기’를 지나 맞이한 시기라는 의미에서 생각의 여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의미심장한 이름답게 생각을 담아낸 말들을 먼저 쓰고, 거기에 선율을 붙여 노래를 만든다. 또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함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인지 되도록 한 노래 안에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래가 굉장히 짧은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포크의 근본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특성 때문일까 ‘생각의 여름’은 박준, 이병률 등 시인들과 문인들에게 많은 애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노랫말을 읽다 보면 한편, 한편이 시와 같이 느껴진다. 시에 소리를 얹어 노래라 칭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기억이 나도 그리워하지는 말자
그리워져도 뒤돌아보지는 말자
뒤돌아서도 걸음 내딛지는 말자
그대 이만 가시길
보내도 가지 않는 시절이여,
안녕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AugGQFKiZ4
그는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붕가붕가레코드’ 소속의 가수이기도 하다. 생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겠다는 ‘붕가붕가레코드’의 오래된 포부를 대변하듯 박종현은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기도 하는 등, 속칭 딴따라 생활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래가 나오는 주기가 비교적 긴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름처럼, 시간이 불분명한 계절을 충분히 소화시킨 후에 말을 짓고 노래를 만들기 때문인지. 계절을 기다린 만큼 그의 미묘한 변화들이 노래 속에 꾹 눌러 담겨있다.
꽃은 피고 새는 날고 바람은 불고 나는 사랑하고
너는 피어 너는 날아 너는 불어와 나를 사랑하고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55l-pm4Wy9I
계절이라는 시간을 말에 담담하게 풀어내고, 요동치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생각의 여름’ 그는 몇 번의 계절을 지나고서 또 다른 시선과 언어로 노래한다.
싱글로 발매된 <From a Tree Perspective>은 전과는 다르게 영어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언뜻 그의 미국 생활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를 바라보는 나무의 시선’이라는 주제를 담기 위함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하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선택한 것이다.
지나온 시간과, 나무라는 소재를 들으면 머릿속에 가을이 떠오른다. 하지만 노래의 앞뒤 그리고 전반에 깔린 사운드를 듣고 있다 보면, 그의 여름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분명 가을을 앞두고 있겠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늦여름 속 나무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 온전히 주변의 나무들로 옮겨간 그의 시선은 하나의 앨범으로 구성되어, 지금 우리 주변을 흘러가고 있는 계절을 설명한다. <From a Tree Perspective>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특징은 엠비언트 뮤직 장르의 참고인데, 흡사 아이슬란드의 밴드 ‘시규어 로스’의 음악과 비슷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시규어 로스’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언어를 통해 노래한다는 점에서도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R0_CTfEYXs
생각의 여름 속 나무(들)의 중얼거림은 자신의 혼잣말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의 신음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어디에서 보길, 한 군락의 나무는 그들 중 하나가 병들면 그를 살리기 위해 뿌리로 영양분을 나눠준다고 했다. 박종현은 그런 나무(들) 속에서 자신과 사람들을 읽어낸 것이 아닐까.
각자 서있지만, 발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이어진 뿌리들, 그로 인해 지탱되는 관계들. 나무(들)가 중얼거리듯 속삭임으로 일러준 세상의 비밀을, 이 앨범을 통해 번역해주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중에 이런 통역가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를 통해 세상에 일렁이는 속삭임을 계속 들어 볼 수 있길, 바란다.
*엠비언트 뮤직
전자음악의 한 종류. 간단히 '앰비언트'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어로는 그대로 번역해서 환경 음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로 따지자면 상당히 오랜 세월을 발전해온 음악 중 하나이며, 일렉트로니카의 태동기부터 존재했던 장르이다. 음악 성격을 말하자면 최소한의 음을 이용해 만든 공감각적이고 명상적인 음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시규어 로스 Sigur Ros
1994년 결성된 아이슬란드 출신의 포스트 록 밴드. 기타를 활로 켜는 독특한 사운드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왜곡된 기타 연주와 보컬 비르기손(Birgisson, J.)의 가성 음성, 실험적이고 미니멀한 음악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The Republic of Trees]에 수록된 노래들에 대한 박종현의 간단한 주석.
01. Preface (서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앓는 사람들,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앓음도 함께 바라봅니다."
02. Looking Downward for Decades (공터라 부르는 곳을 오래 내려다봄)
"심어져 있는 곳에서, 계절이, 사람이, 물건이, 사건이 주변을 들고 나는 것을 목격하고 또 목격합니다."
03. Implanted in the Past (과거에 심겨)
“본능이 욕망을 계속 자라게 하고 그 욕망이 ‘나'라는 나무를 한 ‘곳'으로 얽어맵니다. 얽힘이 곧 생이 됩니다.”
04. Relapse (덧)
“꽃들은 종종 큰비에 찢겨 떨어집니다. 비는 찢긴 상처를 봐주지 않고 또 떨어집니다.”
05. From a Tree Perspective (나무의 시점)
“사람들이 비바람이나 어떤 사건들에 흔들거리고 불안해하고 휘청거리는 것을 봅니다. 그 흔들림은 그들의 내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06. Love Me as Mosses Do (이끼처럼 사랑해 주어요)
“이끼는 때로 나(무)와 공생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순록이 데려가기 전까지 이끼들은 무릎을 매만지고 사랑합니다.”
07. By This Bonfire (불 곁에서)
“가끔 인간들이 나무를 모아 타닥타닥 태우는 것을 봅니다. 나무의 생이 노랗게 허공에 적힙니다.”
08. Late Autumn (늦가을)
“잎에 실어져 있던, 빛을 향한 욕망들을 내려놓습니다. 때가 되면 욕망은 다시 자랄 것입니다.”
글쓴이: 호모루덴스
소개: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맛있게는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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