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26일 에세이레터- 신라 멸망 935년

  멸망에 관해 쓰게 됐다. 멸망이라고 하니 막연했다. 내가 아는 멸망은 백제 멸망 660년, 고구려 멸망 668년, 신라 멸망 935년 정도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멸망의 흔적을 직접 보면 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다녀올 채비를 시작했다. 어디가 좋을까? 가서 뭘 먹지? 공주알밤막걸리, 부여막국수, 경주황남빵 그리고 평양냉면이랑 서울설렁탕…. 숙고 끝에 집에서 멀지 않은 경주에 가기로 했다. 뭐든 가까운 게 최고라지. 황남빵을 먹으러 가자. 

  터미널까지 시내버스로 40분, 경주까지 시외버스로 1시간. 여로는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일과를 마치고 출발했더니 도착할 무렵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도 앱으로 경로를 검색하니 황남동 고분군까지 도보로 27분.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고분만 보려고 계획했기에 욕심내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대로 옆에 떡 하니 자리한 호우총과 젊은이들이 가득한 황리단길과 어설프게 한옥 흉내를 낸 조악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 도착했다. 황남동 고분군. 다른 이름은 경주 대릉원.

  대릉원의 입장료는 3,000원이었다. 입구를 지나 왕릉을 둘러싼 숲길을 걷고 있자니 이름 없는 왕족, 귀족들의 거대한 봉분이 나타났다. 작은 산이나 언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컸다. 고고학 수업 때 배웠던 게 생각났다. 고대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위를 신성화하고자 무덤을 큼직큼직하게 만들었다고. 과연, 절로 경외감이 들긴 했다. 울타리가 없어 “올라가도 되나?” 싶었지만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뭔가 금지 규정이 있겠거니 해서 그만뒀다. 고대인이라고 해도 사람 무덤이니 천벌 받을 거 같기도 했고. 아니나 다를까, 구석에 작은 팻말이 보이는데 “고분에 올라가는 행위는 2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 2,000만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 2,000만 원이라니. 진정한 천벌이다.

  대릉원은 고요했다.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브이로그도 찍고 하하 호호 웃으며 다녔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대릉원 담장 바깥의 포석로에서 비치는 밝은 불빛은 무덤의 그늘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멸망을 생각했다. 사라지는 것들에 관해서.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부귀권세를 누리던 왕과 귀족도 똑같다. 말 없는 무덤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죽고 썩어 문드러져 사라질 거라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허무함마저 느껴졌다. 멸망은 이토록 허무한 걸까?

  한참 고민하며 황남대총 옆을 걷는데 어떤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은 전국평균 영하 7.7도인 얼음장 같은 날씨였다. 나 또한 내복까지 꼭꼭 껴입었고. 그런데 이 여성은 데이트를 위해 열심히 꾸민 것 같았다. 무려 그 추운 날씨에 치마를 입었으니까. 아… 삶의 위대함이여. 진정으로 감탄했다. 이 한파에 치마를 입고 무덤을 둘러보려는 용기와 사랑이야말로 멸망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저항이 아닌가 하는 숭고미마저 느꼈다. 죽은 왕들은 살아있는 커플 앞에서 순식간에 병풍이 되었다.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대릉원에서 나오는 길에 마지막 코스인 미추왕릉에 들렀다. 오늘 대릉원 방문객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주십사 청하며 나왔다. 대릉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남빵 본점에 들렀는데 황남빵은 바삭하고 달콤했다.

✨구독자 님의 코멘트로 오롯이를 완성해주세요

에세이 감상 남기기

오늘의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오롯이 남겨주세요!

짧아도, 길어도 좋아요. 개인적 경험? TMI? 대환영이죠🥰

남겨주신 코멘트는 필진에게 전달돼요.

다음 주 레터에 실릴 기회까지💌

▶ 지난 주 순두부님의 에세이를 읽고 구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에요✉

▶ 순두부님의 지난 에세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