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4일 에세이레터- 진심을 담아,

H에게.

  잘 지내고 있니? 소중한 에세이레터를 너에게 써주는 건데 영광으로 생각해줘.

  어떤 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네가 학회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실컷 늦잠 자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던 게 먼저 기억난다. 너는 밤새거나 늦게까지 일하는 날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정말 많이 올리잖아? 그래서 스토리가 유난히 자주 올라오는 날이 많아지면 짠한 마음이 들고 그래. 그래도 진짜 끝이 코 앞이다! 주변 친구들한테 설문조사 해달라고 조르는 일도 없겠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 설문조사 해달라고 부탁하는 정도나 빈도가 좀 심하긴 했어. 몇 번 더 하다가는 이제 단체 채팅방 몇 군데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특히 연락 안 한 지 좀 된 채팅방 들어가서 설문조사 부탁할 때 새삼 대단하다 싶었다… 아무튼 이제 설문조사도 밤샘도 확 줄일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돼!

  음, 하나 덧붙이자면 학회가 끝나는 날에는 예상외로 왠지 눈물이 찔끔 나올지도 몰라. 아무리 탈출하겠다고 다짐한 곳이어도 진짜 안녕이라 말할 때가 오면 난 그렇게 훌쩍거리게 되더라고. 조금 무책임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신없는 나날 가운데, 그 순간순간을 조금 더 즐길 수 있길 바라.

  요즘 인턴 지원하려고 이런저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중이라고 했잖아. 노션 쓰는 게 아직 어색해서 포트폴리오가 영 서툴러 보인다고 네가 말했는데, 포트폴리오에서 조금 어설프고 귀여워(?) 보이는 부분들이 있긴 하더라. 그래도 유치했던 조각들이 있어야 더 나아질 수 있는 거 같아. 그리고 노션으로 지금 고생하고 있는 게 나중에 인턴이 됐을 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난 회사 다니면서 노션 써서 편했던 적이 많았거든. 부서에서 노션 관련한 일이 있을 때 나름 담당을 해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진 마. 그리고 사실, 지금 내가 멋진 척하면서 너한테 해주는 이런 말도 나중엔 그냥 멋진 척 심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히히

  지원한 몇 회사 중에 이미 1차 전형을 떨어져 버린 곳들이 있어서 아쉽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래서 나도 고민을 해봤는데, 인턴도 뭔가 대학 입시랑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고등학교 3학년 땐 입시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고 ‘누구는 이미 00대학 붙었대' 같은 이야기에 엄청 흔들리잖아. 대학 하나 떨어질 때마다 심장도 같이 내려앉고. 근데 사실 여러 대학을 붙어도 갈 수 있는 곳은 한 대학이고, 대학교 들어와서 두어 주만 보내도 입시 관련한 건 많이 잊게 되잖아? 대학 지원할 때엔 ‘붙여만 주신다면 매번 정문에 절하면서 다니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빌지만 한 일주일만 지나도 그 소원은 까먹게 되고. 너도 그때 큰절하네 어쩌네 했는데 한 달인가 지나고 교수님 미워했던 거 다 기억해!

  인턴도 그런 것 같아. 계속 떨어질 땐 내가 뭐가 그렇게 모자랄까 싶어서 자존심도 상하고, 인턴 됐다는 친구들 소식 들으면서 초조해지고. 근데 막상 붙고 나니까, 합격의 기쁨이 생각보다 금방 쪼그라들더라고. 합격 메일을 받은 그 몇 시간 정도 기쁘고, 그보다 훨씬 긴 시간 ‘출근하기 싫어 송’을 멋대로 지어서 부르고 퇴사하겠다고 흥얼거리고 그래. 회사원 이모티콘도 엄청 많이 샀다. 이미 회사를 다닌 사람이 하는 말이라 재수 없다고 생각하려나? 하고 싶은 말은, 어디든 붙고 나면 생각보다 별거 없는, 적당히 지루하고 피곤하고 즐거운, 예상할 만한 일상이 이어진다는 거야. 대학 입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여러 회사를 붙어도 갈 수 있는 회사는 하나! 그러니까 하나만 잘 뚫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어. 나도 아직 단단하진 않지만 말이라도 해볼게.

  이것 말고도 네가 했던 이야기가 또 뭐가 있더라…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넌 걱정이 없으면 걱정을 만드는 사람인 거 같아. 매번 무언갈 고민하고 있고, 그 고민이 해결되어서 객관적으로 괜찮은 상황이 오면 닥칠지 모르는 부정적인 상황을 그리곤 하잖아. 무슨 걱정 은행에서 매번 무이자 할부로 걱정을 잔뜩 빌려오는 거 같아. 하도 다양한 걱정을 말해서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빠르게 하나씩 짚어주자면! 이대로 영원히 애인 없이 혼자 살 거라고 궁상맞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정말 좋은 친구랑 우연한 계기로 잘 될 거야. 인턴도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붙었다고 연락을 줄 거야. 거기서 걱정한 게 민망할 정도로 정말 좋은 동기들을 만날 거고. 내내 떨어졌던 공모전도 결국 하나 상 받아본다. 첫 타투 허락은 생각보다 쉽게 받을 거고 타투도 별로 아프지 않아. 그다음부턴 온몸이 화폭으로 보일 수도 있어. 난 분명 미리 경고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왜냐하면 반년쯤의 시간이 지난 H는 방금 말한 모든 걸 이뤘거든. 다 네가 조금씩 조금씩, 결정의 순간마다 자신감 있게 움직여줘서 가능했던 일이야. 걱정을 안고 사는 너를 응원하고 싶어서 쓴 글이었는데, 다 쓰고 보니 사실 반년 전 H는 이런 스포일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잘해준 것 같아.

  덕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을 기다릴 때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리는 일은 항상 궁금하면서도 힘들어. 좋은 결과가 기다린다 생각하면서 잔뜩 설레다가도 최악을 상상하며 플랜 B를 준비하기도 하니까. 아무튼, 잘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래서 지금의 나는 행복한 거 같아. 

  그러니 이왕이면 좋은 내일을 기다려보자. 

진심을 담아, 

너보다 반년 더 나이를 먹은 H로부터

✨구독자 님의 코멘트로 오롯이를 완성해주세요

에세이 감상 남기기

이번 주 '기다리는 일'을 끝으로 <오롯이 프로젝트 시즌 1>은 마무리됩니다.

오늘의 에세이 혹은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감상을 공유해주세요!🥰

남겨주신 코멘트는 필진에게 전달됩니다.

▶ 지난 주 무화과님의 에세이를 읽고 구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에요✉

▶ 무화과님의 지난 에세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