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27일 에세이레터- 펑, 삐-

  어떤 멸망은 조금 더 슬프다. 좋아하던 밴드의 해체, 자주 가던 식당의 폐업,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매일 많은 것들은 내 삶을 찾아오고, 또 떠나간다. 사실 멸망이라 부르기엔 조금 거창한 그저 사라짐이겠지만, 어떤 사라짐은 내게 멸망만큼의 후유증을 남기고 간다.

  나는 내 첫 연애를 정말 지키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할 무렵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장장 5년에 걸친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한 오십 번 정도 헤어짐을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다섯 번쯤 헤어졌었다. 조금 전에 첫 연애를 정말 지키고 싶다고 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겠지만, 나름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꾹 참은 셈이다. 특별히 아주 전쟁 같은 사랑을 한 건 아닌데, 사춘기 때의 연애가 으레 그러하듯 각자 자신만의 감정을 앞세우다 되려 자기의 칼에 자기가 찔려 다치고 상처받기 일쑤였던 것 같다.

  그렇게 찾아온 몇 번의 짧은 이별마다 먼저 헤어짐을 말하는 쪽은 항상 나였다. 홧김에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으나, 꼭 뱉어 놓고 며칠 못 가서 후회하며 다시 붙잡곤 했다. 이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3일을 넘긴 적이 없었던 우리의 이별. 그때마다 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엉엉 울며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가오지도 않은, 혹시 모를 미래의 진짜 이별은 얼마나 더 아프고 힘들지 미리 겁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오십 번의 헤어짐을 떠올리고 몇 번의 이별을 말하면서도 우리에게 진짜 끝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도 있고 관계가 위태로웠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우리의 연애 방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진짜 끝’이 있었다. 여느 다툴 때처럼 서로 감정이 격해지던 어느 날, 긴 침묵 뒤 그 애가 꺼낸 말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가 아닌, “우리 이제 그만할까?”였다. 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고 “어… 아니, 그러지 말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끝났다. 중간에 작가가 튀어서 영원히 엔딩을 볼 수 없는 네이버 도전 만화처럼, 내 연애는 그렇게 홀연히 멸망했다.

  정말 묘한 이별이었다. 슬픈 감정보단 공허하고 멍한 느낌이 지배적인. 왜, 영화에서 보면 폭탄이 펑 하고 터지고 나서 잠시 동안 삐-하면서 주변 모든 게 고요해지는 장면처럼, 나의 일상이 온통 몽롱하고 어수선한 빛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대폭발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부드럽고 나른한 햇살, 혹은 유년 시절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의 그 따스하고 외롭고 어수선한 공기와 같은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뒤덮었다. 신기할 정도로 잔잔하고 평화롭던 내 첫 연애의 멸망, 어떤 중요한 챕터의 끝. 그렇게 조용히 내 삶의 한 시절이 저물어 감을 느꼈다.

  어떤 멸망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덜 슬프다. 대신, 조금 더 기억에 남는다. 이제 더는 슬프지도 공허하지도 않은 지난 날이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난 아주 조금, 하지만 확실히 변했다. 보다 신중하게 말하려 하고, 내 감정을 정확히 알려고 하고, 조금 더 괜찮은 끝을 맺고자 하고. 내 손으로 야기한 멸망이든 느닷없이 찾아온 멸망이든 어떤 사라짐은 나에게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흉 지지 않게 잘 보듬을 수만 있다면 그 자리는 또 새로운 소중한 것들로 채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는 운석 같은 멸망의 순간들이 떨어질 것이다. 충격파에 장렬히 전사할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조금 뒤틀리고 파이는 정도에 그쳤으면 좋겠다. 작은 멸망들로 단단해지다 보면 언젠간 내 삶에 찾아온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럴 수 있다면 조금 더 슬픈 멸망도, 조금 덜 슬픈 멸망도 꼭 슬프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여담이지만 때로는 좋아하던 밴드, 자주 가던 식당,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져서 슬픈 마음보다 그 마음이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슬퍼 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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