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28일 에세이레터- 도망가자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것 같다.”

  읽으시는 분에 따라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 몇 년 전의 일화를 소개한다.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애인과 누워서 그런 말을 했었다. 애인은 뜬금없다며 웃었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기분이었다. 어느 날 이 세상의 끝이 있다면, 사람들이 흔히 ‘멸망’이라고 부르는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꼭 너와 단둘이 남아서 이런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고.

  1. [명사] 멸망(滅亡): 망하여 없어짐.

  사전에서 말하는 ‘멸망’은 생각보다 현실적인 단어였다. 세상이 망해서 없어지는 날에도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가 아닌 애인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조금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사전을 벗어나 검색창을 훑으면, 사전보다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멸망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지구 멸망’, ‘고조선 멸망한 이유’ 같은 것들.

  한 가지 더 놀란 것은, 멸망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일로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쫄딱 망해 스러져 가는 세상을 목도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고 멸망을 만나고 싶다. 세상과 나의 마지막 하루를 슬픔 대신 애틋함으로 꾸며 영원한 오늘로 박제하고 싶다.

  그런 바람을 담아서, 나는 나만의 사전 속 ‘멸망’을 새롭게 정의했다. 새롭게 뜻풀이된 멸망의 유의어도 멋대로 정해 주었다.

  [명사] 멸망(滅亡): 내일이 오지 않는 오늘.

  2. [명사] 동반¹(同伴): 일을 하거나 길을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할 때 함께 짝을 함. 또는 그 짝.

  누가 무엇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일어나는 일은 그저 현상 자체일 뿐이다.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방법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나에게 그 방법은 멸망이라는 현상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멸망의 동반자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멸망이 찾아오는 그 날에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계획 대신 동반자를 상상하기로 한 것이다.

  ‘멸망’의 정의를 알고 난 뒤에는 과거의 내가 했던 생각을 부끄러워했었다. 그 멋쩍음이 무색하게, 나는 다시 과거의 말을 반복한다. 지금보다 두세 살도 더 어렸을 때 애인에게 했던 말, 그리고 감히 꿈꾸었던 그 생각 말이다. 내일을 잃고 미래를 빼앗기는 그 초유의 날에, 나는 사랑하는 연인 곁에 있고 싶다고.

  왜 가족이나 친구와 멸망을 함께하려 하지 않냐고? 나는 그것이 싫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니 서로의 해묵은 과거를 반추하고 말로 다 못 할 막대한 감사함을 포옹으로 표현하는 것. 그런 것은 한사코 거절하고 싶다. 일평생을 함께해 온 그들과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나는 살고 싶어질 것 같다.

  세상의 끝에서 삶의 영속을 희망하는 것은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할까. 그러니 나는, 반짝 타오르는 사랑을 하는 연인을 멸망의 동반자로 택할 것이다.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지구상 마지막 입맞춤을 나눌 것이다.

  3. [명사] 소망(??): ??

  바꾸어 말하면,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도 손을 뻗고 싶고, 삶의 최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불효막심한 낭만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어차피 마지막인걸.

  이것은 소망³하는 날에 대한 나의 소망²이다. 소박하지만 거창하다. 사랑을 꿈꾸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비단 연인과의 그것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연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미지의 관계에 놓여 있어도, 그 사람과 내가 소망³의 하루에서 서로를 소망²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함께 멸망의 밤을 바라본다면.

  그날은 아주 훌륭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

  [명사] 소망³(消亡): 사라져 없어짐.

  [명사] 소망²(所望): 어떤 일을 바람. 또는 그 바라는 것.

🎵 오늘의 노래 - 고닥 "우리 멀리 떠날까"

✨구독자 님의 코멘트로 오롯이를 완성해주세요

에세이 감상 남기기

오늘의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오롯이 남겨주세요!

짧아도, 길어도 좋아요. 개인적 경험? TMI? 대환영이죠🥰

남겨주신 코멘트는 필진에게 전달돼요.

다음 주 레터에 실릴 기회까지💌

▶ 지난 주 오브님의 에세이를 읽고 구독자님들이 남겨주신 감상이에요✉

▶ 오브님의 지난 에세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