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부모와 형제자매, 자기 생명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
이것은 문자 그대로 가족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초대이다. 가정과 사회, 문화가 덧씌운 정체성—좋은 사람, 충실한 구성원, 성공적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동일시하는 에고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에고를 내려놓을 때 열리는 내적 공간

그 내려놓음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다. 에고의 옷을 벗을 때 비로소 내적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은 고요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와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맛본다.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하거나 지키려 애쓰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내려놓음은 쉽지 않다. 우리는 익숙한 둥지 안에 앉아 있는 청둥오리 새끼와 같다. 둥지는 좁고 불편하지만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둥지를 떠나지 않으면 결코 강물의 자유로운 흐름을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익숙한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이해 속에 갇혀 둥지에서만 살게 된다.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운데도, 계속 비비고 앉아서 있게 된다.
믿음의 도약은 추락의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 도약 속에서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다. 청둥오리가 뛰어 내리는 것과 같다. 둥지를 뛰어내릴 때 새로운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리스크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
계시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함께 먹고, 마시고, 현존으로 함께 하시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이 문을 여는 것이 진정한 신뢰요, 주님에 대한 예스요, 삶에 대한 예스이다. 그러나 처음 예스를 해서 내 마음에 모셔들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더욱 더 깊은 사귐과 현존의 상태에 머물지 못할 때마다 주님은 다시금 노크를 하신다. 더욱 더 깊은 차원의 나의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말이다.
걱정과 불안에 휘둘릴 때,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며 실망할 때, 잘 보이고자 애쓰며 완벽주의에 갇힐 때, 남들을 비난하거나 비교하며 우월감을 증명하려 할 때—바로 그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기에도 문이 있다. 열어 주렴."
이런 모든 것들에서 자유하려면, 나라는 에고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 에고가 자라난 환경과 관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럴 때만 더욱 더 깊이 있는 더욱 더 근원적인 나를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청둥오리가 둥지를 뛰어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예'라고 응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여러 겹의 문으로 되어 있다. 주님은 더 깊은 문 앞에서 계속 두드리신다.
무저항의 기도
이런 증상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 알아차리는 것이다. 더욱 근원적인 자리에서 깨어 있는 것이다. 생각에 빠지지 않고, 침묵으로 돌아온다. 몸의 감각으로 돌아온다. 현존의 자리로 돌아와서 나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나의 깊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기도는 또한 무저항의 수련이다.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저항을 온전히 깊은 곳에서부터 내려놓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할 일들이 많은가?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가?" 이 모든 것들, 즉 삶에 대한 저항과 장애물을 적으로 보는 시각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스, 항복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지고 있다. 그냥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것을 온전히 수용하고 경험해 나가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저항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이미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다.
일상의 작은 연습
기도는 단순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친밀함, 그냥 함께 머무는 현존이다. 그 현존 속에서 주님은 나의 에고를 넘어 더 깊은 자리로 인도하신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이 이 기도의 훈련이 된다. 아내에게 서운함을 솔직히 표현하는 일, 동료에게 정성스럽게 응답하는 일, 친구를 목적 없이 그냥 초대하는 일. 사람을 목적과 수단으로 나누지 않고, 이용의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그냥 함께 하는 것. 이 모든 작은 행동들이 무저항의 연습이다.
디파 이예르(Deepa Iyer)가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참된 섬김이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으로 기대어가는 것,
답을 들고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부드럽게 하며
함께 살아있음의 고요한 교향곡을 신뢰하도록 초대하는 것.
이것이 그 일이다— 너의 작은 물결들이 그들의 광활함에 닿도록 하여,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평범한 순간들을 거룩한 만남으로 변화시키는 기도이다.
이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루 종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게 된다—우리 고투 아래에서, 혼란 위에서, 외로움 곁에서, 그리고 가장 일상적인 일들 안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통해 숨쉬시는 하나님을,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을 통해 흘러가시는 하나님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어려운 사람들과 벅찬 상황들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릴 때, 아름다운 무언가가 드러난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부드러워질 때, 우리는 더 깊은 물결에 이끌려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때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낡은 장벽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열린 마음으로 머무르려는 우리의 의지—그 부드러운 무저항—이 하나님께서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를 통해 일하실 공간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한다.
새로운 현존의 삶
그럴 때 나라는 에고의 정체성을 넘어서 주어지는 새로운 나 자신과 조금씩 접촉하게 된다. 남들의 시선에 덜 의식하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선택에 조금씩 더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 삶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한 현존을 할 수 있다. 그 현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 가운데 현존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린다. 그것이 최고의 섬김이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신 스스로를 발견하도록 해 주는 작은 행동 하나, 반응 하나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진정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분리되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어서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안내하시는 대로 어디든 맡기고 따라가는 삶이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성장이 있고, 온전함이 있다.
에고가 보던 다양한 장애물들과 고통들이 사실은 더욱 깊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런 축복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의 초대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다 내려놓고 나를 따르라! 네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오늘도 다양한 실망, 좌절, 화, 질투, 그리고 기쁨, 평안의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 예, 하고 따라 나서는 모험. 나의 둥지를 뛰어 내리는 믿음의 도약. 작은 일들을 통한 뛰어 내림의 연습을 해 나가는 기쁨을 계속 맛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제자의 길은 완벽을 이루는 길이 아니다. 내려놓음과 무저항을 통해 오늘 주어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믿음의 도약을 통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삶이다.
묵상과 기도
- 오늘 내가 붙잡고 있는 둥지 하나를 이름 붙여본다면 무엇일까?
주님, 둥지를 떠날 용기를 주시고, 저항하지 않고 오늘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저의 작은 현존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주님의 사랑이 흘러갈 통로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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