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습관이 내 안의 저항으로만 보이던 시절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성향, 여기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과거의 나라면 이런 자신을 채찍질했을 것이다.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 책임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은 이 미루기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본다.
내 안의 저항이 사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초대장이었다는 것을. 무언가를 잘해보려는 마음, 완벽하게 해보려는 에고가 일으키는 소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고요한 자리로 돌아가라는 부드러운 손짓이었다는 것을.
저항이 초대가 되는 순간
기도는 단순히 무엇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할 때, 모든 일들이 달라진다. 영성지도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목표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존재 상태에서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나의 에고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연결보다 우선될 때, 나는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한 증상이 일들을 미루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 나는 이제 다른 선택을 한다. 자책하는 대신 기도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든 마음들을 있는 그대로 열어드린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런 모습입니다. 이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당신께 드립니다."
신기하게도 저항이 사라진다. 그리고 주어진 일들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된다.
현존 속에 머무는 기도
바로 이 은총의 경험은 내가 오래 붙들던 질문—마리아와 마르다, 기도와 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와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두 가지 여정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연결에 근거해서 구체적인 일들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행하는 것이다.
참자아와 에고의 조화가 필요하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함께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것이 나무의 뿌리와 같다면, 뿌리가 있어야 열매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뿌리만 있고 열매가 없어도 안 된다.
기도는 바로 이 내적인 공간,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저널을 통해서, 좋은 책들을 통해서, 심지어 하늘을 보는 순간이나 지나가며 핀 꽃을 보면서도.

백합화의 지혜
요즘 새롭게 제공하는 코스들의 등록 현황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뭔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데 기도 안에서 다른 관점이 열린다. 백합화가 지금 싹을 틔우는 단계여도, 여전히 백합화라는 것을. 나의 에고는 빨리 꽃피우기를 원하지만, 백합화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를 밟고 있을 뿐이다.
이 자리에서는 한 영혼과 세상이 같은 크기로 보인다. 어떤 드러나는 결과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임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하루를 살면서 몇 차례, 기도의 자리로 다시 몸을 앉힌다. 하지만 진짜 도전은 남은 시간들이다. 일상의 모든 일들과 관계 속에서 이 하나님의 현존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
일상에서 다시 에고로 기울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작은 표지들을 붙잡는다. 한 문장을 통해, 단어를 통해, 호흡을 통해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온다. "예수님"이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거룩한 춤으로의 초대
마리아와 마르다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 나의 참자아와 에고가 함께 춤추는 삶,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마음껏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
나의 할 일은 마음을 비우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 의식적인 마음을 가지고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해야 할 일의 무게 속에서도, 미루기가 찾아올 때도, 나는 여전히 초대받고 있음을 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춤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이것이 내가 배워가는 거룩한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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