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오랫동안 인정받는 눈빛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눈이 빛날 때—나는 살아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 누나의 친구들—그 눈빛들 속에서 나는 안전했다.
아버지와 형들의 세계는 달랐다. 말보다 침묵이 먼저였고, 기대가 칭찬보다 앞섰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여성의 눈빛 속에서 내가 빛난다는 걸.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내 안에 오래 새겨진 것이었다.
데이트의 눈빛은 변한다
결혼은 그 눈빛을 바꾸어 놓는다. 아내도, 나도 그렇게 된다. 처음 데이트할 때의 이상화는 사라지고, 서로의 실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모습이 아닌 상대를 마주했을 때, 그 낯섦은 생각보다 깊이 찌른다.
아내가 나로 인해 안전함을 느끼길 바랐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모습들이 드러났고, 아내는 그것을 표현했다. 나는 그것을 나 자신에 대한 정죄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정죄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그렇게 들렸다.
그 느낌이 쌓일 때 나는 다른 곳에서 숨을 찾았다. 목회와 영성 사역에서도 판단과 정죄의 목소리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따뜻함이 깊어질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인정이 방향을 바꿀 때
주어진 역할에 성실했던 한 사역자가 있었다. 그는 담임 목사가 변하길 바랐다. 조언했고, 밀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다.
화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정의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옳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 화가 담임 목사에게도 닿았고, 담임 목사도 점점 힘들어졌다.
집에서도 아내의 조언과 판단들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기대에 맞추지 못하는 자신을 자주 마주했다. 그 좌절이 쌓였다. 그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다고 느꼈다.
함께 사역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였고, 그의 판단에 동의했으며, 그의 수고를 알아주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불륜을 원했던 게 아니었어요. 거기에 쓸려가고 있다는 걸,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결핍이 방향을 바꾼다.
설렘 아래에 있는 것
내가 원했던 건 설렘이 아니었다.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흥분이 아니라 이 말들이다. 할머니의 눈빛, 어머니의 손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던 그 따뜻함.
사람들의 인정은 실제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뿌리는 아니다.
세상은 말한다. "더 증명하라." 그런데 다른 목소리가 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다."
조건이 없다. 아내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담임 목사가 알아주지 않아도. 청중이 박수치지 않아도.
그리고 한 문장이 더 있다.
"하나님이 너를 품으려 하신다 (God wished to have you)."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처음부터 충분했다.
내가 내게 먼저
팬홀더에서 RSV로 바꿨다. 이제는 한 면이 아니라 양면을 써야 했다. 특히 백핸드가 새로웠다. 몇 번 연습한 뒤, 게임에서 처음 써봤다. 그 날 왼쪽이 약해서 늘 점수를 내어주던 바로 그 자리에서, 왼쪽 공격으로 점수를 냈다. 그 순간이 충격처럼 마음에 남았다. 내가 공격해서 점수를 냈다니.
집에 와서 그 기쁨을 아내에게 나누었다. 아내가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돌아보니,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그 기쁨을 아내에게 전하기 전에, 나는 그것을 내 안에서 충분히 누렸는가? 점수가 났을 때, 내가 나 자신에게 말했는가—"잘했어. 오늘 진짜 잘했어."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 자신에게 먼저.
충분한가
만약 아무도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충분한가.
이 질문은 나를 벌거벗게 만든다.
"아니요"라면, 나는 계속 누군가의 눈빛을 찾아 헤맬 것이다. 때로는 위험한 곳에서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아직 완전히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박수는 보너스가 된다. 생존 조건이 아니라.
길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기도의 자리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글을 쓸 때—그때 내가 여전히 거기 있고, 충분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
그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다. 나는 너를 기뻐한다."
"두려움보다 먼저 온 것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비어 있지 않은 고요함 같은 것."
비어 있지 않은 고요
어느 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도도, 묵상도, 글도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박수도 없고, 인정도 없고, 아내의 눈빛도 없는 그 자리에서.
두려움이 먼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두려움보다 먼저 온 것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비어 있지 않은 고요함 같은 것.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새벽의 침묵 속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그 자리에 이미 있었다.
아내가 완벽한 안전기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누구도 그 자리를 채울 수 없다. 그 자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것을 알 때, 나는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증명하지 않고 드러낼 수 있다.
나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나는 박수 없이도 여기 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 저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마가복음 1:11
잠깐, 그 자리를 떠올려 봅니다.
지금, 당신 안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먼저 닿는다면,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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