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

관상 언어 뒤에 숨었던 두려움

2026.02.22 | 조회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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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Heart

관상적 기도, 경청, 그리고 삶 (contemplative prayer, listening, and life)을 위한 글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것 —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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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것 — 그것뿐이었다. Generated by ChatGPT  

멈추는 법을 배웠다. 머무는 법을 배웠다. 열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불편한 질문이 왔다. 세상은?

나는 뉴스를 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멀리하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무력해지고 화가 나고, 그럴수록 더 보게 되었다. 기도하고, 책을 읽고, 침묵 속에 앉았다. 나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회피였다.

 

회피

나는 뒤로 빠지는 사람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오랫동안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경계를 세운다." "에너지를 보존한다." "진실에 머문다." 이 말들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불편한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음"으로 변환하고, "혼자가 더 효율적이다"는 논리를 더하면, 빠지는 것이 마치 지혜로운 선택처럼 느껴진다.

불편한 관계가 있는 모임에서 빠지는 것. 낯선 사람들 앞에 나를 내놓는 것이 어려운 것. 세상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는 것. 전부 같은 뿌리였다. 안전하지만 연결되지 않는 삶.

머튼의 문장이 떠올랐다. 관상은 도피가 아니라, 더 깊이 보는 것. 나는 관상적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감은 눈이었다.

지난 주 오후, 관상기도와 사회정의를 연결하는 기도 모임을 안내해야 했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주제였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부끄러움

나는 세상의 고통 앞에서 작아졌다. 팔레스타인, 이민자 단속, 정치적 폭력 — 그 단어들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행진을 하고, 서명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 사랑받지 못할까 봐.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영적 언어 뒤에 숨겼다. "관상적 삶을 산다." "내면의 변화가 먼저다." "반응적으로 살지 않겠다." 사실이면서 동시에 — 도피.

기도 모임에서 물었다. 세상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 나에게 올라온 것은 복잡했다. 걱정, 판단, 화. 그리고 두려움. 피하고 싶은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 아래에 뭐가 있었나. 폭력에 대한 저항. 정의 없이 밀어붙이는 권력에 대한 분노.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계셨던 분. 도망가지 않으셨던 분. 그 분은 두 발을 딛고 서 계셨는데, 나는 계속 한쪽 발을 빼고 있었다.

폭력은 때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외면하는 것, 침묵하는 것, 없는 척하는 것도 폭력이었다.

나의 폭력은 무엇이었는가.

뉴스를 피하는 것.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화면을 보지 않는 것. 기도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무시. 분노를 억누르는 것.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지는 것. 작을 때 말하지 않고, 쌓이고 쌓여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패턴. 판단하는 것.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마음 안의 법정에서 누군가를 유죄로 선고하는 것.

이것을 판단 없이 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 내가 도망가고 있었구나. 아, 내가 무시하고 있었구나.

이 "아"가 첫 걸음이었다.

 

두려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봐야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눈을 감고 있었는가. 나는 감정이 깊은 사람이다. 불의를 보면 분노가 빠르게, 깊게 올라온다. 그 분노가 나를 부술까 봐 — 터져 나와서 관계를 깨고, 나를 무너뜨릴까 봐 — 나는 한쪽 발을 빼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물러남은 결국 눈을 감는 일이 되었다.

고통을 보면서도 반응적으로 뛰어들지 않고, 그렇다고 눈을 감지도 않고 —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모임이 끝나갈 때, 마음에서 올라온 것이 있었다.

"5분만 뉴스를 보겠습니다. 불편한 감정에 머물겠습니다. 책을 읽고 싶어하고 침묵 기도를 드리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 이 세상을 알고 싶습니다."

그날 저녁, 미니애폴리스에서 있었던 이민자 단속 영상을 5분 동안 봤다. 가슴이 뛰었다. 마음이 아팠다. 걱정이 올라왔고, 화가 올라왔다. 끄고 싶었다. 끄지 않았다. 그 감정들을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정의가 바로 서게 해 달라고. 이 사람들을 지켜 달라고. 그리고 슈퍼볼에서 Bad Bunny가 스페인어로만 노래하는 영상을 봤다. 작은 희망이 올라왔다.

그 순간, 무언가가 바뀌었다.

숨어 있을 때는 몰랐다. 도망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가슴이 넓어졌다. 억지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무게가 내려가고, 그 자리에 — 작지만 진짜인 마음이 올라왔다. 이 세상이 궁금해지는 마음. 기도실 안에서 느꼈던 하나님이 기도실 밖에도 계신다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

아, 이렇게 연결될 수 있구나.

성경을 읽듯이 뉴스를 읽는 것. 기도하듯이 세상을 보는 것. 그것이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 숨는 것을 그만뒀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용기가 — 내가 만든 것이 아닌 용기가 — 조금씩 올라왔다.

세상 전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인가.

5미터.

가족. 내가 안내하는 사람들. 그들이 겪고 있는 세상. 그들의 외로움, 두려움, 소외감.

뉴스를 보면 여전히 끄고 싶어진다.

그러나 오늘, 한 가지를 했다. 눈을 감지 않았다. 내가 도망가고 있었다는 것을 봤다. "관상적 삶"이라는 말 아래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 조금씩 열렸다.

 

나는 어디에서 한쪽 발을 빼고 있는가. 그 자리에 —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용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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