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움의 습관
새벽에 문득 깼다. 기도 때문이 아니라, "뭔가 해야 한다"는 조용한 불안 때문이었다. 꽤 오래, 그런 새벽들이었다.
깊이를 쌓으면 될 줄 알았다. 더 읽고, 더 정리하고, 더 저장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옮겨 두었다. 다시 열어보는 일은 드물었지만, 저장해 두면 마음이 놓였다. 그건 지식 관리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불안 관리였다.
어느 날 한 질문 앞에 섰다.
결핍 때문에 읽는가, 아니면 만나고 싶어서 읽는가.
새벽엔 여전히 결핍의 손이 먼저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냥 좋아서 펼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책을 덮고 나서도 더 찾지 않았다. 예전에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읽었다. 그래서 늘 "아직"이 남았다. 아직 더. 아직 부족. 아직 못 미침. 그건 깊이가 아니었다. 긴장이 두꺼워지는 과정이었다.
발효의 원리
빵을 발효시키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통을 닫고 기다리면 된다. 5분마다 열어보면 발효는 멈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영혼의 깊이도 그런 것 같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쟁여두는 쪽에 더 기울어 있었다. 소화는 없었다. 축적만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쌓아도 허기가 남았다. 깊이는 먹는 양에서 오지 않는다. 소화에서 온다. 그리고 소화는, 멈출 때 일어난다.
깊이를 만드는 쪽과 깊이 안에 있는 쪽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깊이를 만드는 쪽은 항상 긴장해야 한다. 생산해야 하고, 증명해야 하고, 유지해야 한다. 잠시 멈추면 사라질 것 같다.
깊이 안에 있는 쪽은 멈출 수 있다. 오늘 아무 통찰이 없어도 괜찮고, 오늘 책 한 줄 읽지 않아도 괜찮다. 깊이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를 만드는 쪽이 더 익숙했다. 아직 그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멈춘 날이 더 가벼웠다.
머무는 연습
텅 빈 시간이 두려운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아무 역할도 없고, 아무 성과도 없는 순간이 오면, "나는 지금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지?"라는 질문이 올라온다. 그래서 다시 채운다. 책을, 모임을, 구조를, 준비를. 이 불안은 잘못이 아니다. 오래된 생존의 목소리다.
고마워. 그런데 이제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센터링 침묵기도는 그 훈련 중 하나다.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걸, 거기서 조금씩 배운다. 어떤 날은 그것이 기도의 형식조차 갖추지 않기도 한다. 모임이 끝나고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 아무것도 열지 않고 그냥 앉아 있는 십 분. 기도를 놓아도 하나님은 이미 거기 계신다는 것, 요즘은 그게 조금 덜 낯설다.
관계와 리듬
관계도 발효된다.
깊은 대화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목적 없는 시간을 함께 견딜 수 있을 때 — 그때 관계가 깊어진다. 빵이 발효되려면 공기와 온도와 시간이 필요하듯, 관계가 발효되려면 목적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낭비라고 했던 그 시간이, 사실은 발효되고 있었다.
리듬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3분의 침묵,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머무는 그 틈 — 그것들이 낭비가 아니라 발효의 조건이다. 흩어져도 괜찮다. 잊어버려도 괜찮다. 돌아오는 길을 아는 것이 전부다.
적어도 내게는, 머무는 쪽이 더 깊었다.
지금 나는 채우려 하는가, 머무르려 하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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