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좀 믿으면 어때서? (2)

인식론/윤리학: 인식적 의무와 믿음의 윤리학(ethics of belief)

2022.04.06 | 조회 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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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일주일이 궁금한 철학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마무리 작업이 늦어져 마감 기한 준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정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며, 다음 레터는 정상적으로 일요일에 발송됩니다.

그레이스메리아의 해방과 키이우의 유령

최근 콘솔 게임기를 구입했습니다. 최신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5나 XboX Series X가 아닌, 무려 2005년에 출시된 XboX 360입니다. 구닥다리 기기를 구입한 목적은 단 하나, 오로지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에이스 컴뱃 6: 해방의 불꽃
에이스 컴뱃 6: 해방의 불꽃

<에이스 컴뱃>은 반다이 남코가 제작하는 플라이트 슈팅 게임 시리즈입니다. 가상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가상 국가의 전투기 파일럿이 되어 공중전을 치르는 게임이지요. <에이스 컴뱃> 6편은 가상의 공화국인 에메리아(Emmeria)를 옆나라인 에스토바키아(Estobakia)가 기습 침공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플레이어는 에메리아 공군의 파일럿으로 참전하여 침략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면서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에이스 컴뱃> 시리즈는 게임의 완성도 자체도 높은 편이지만, 뛰어난 음악, 영화 같은 스토리와 연출이 특히 유명합니다. 스토리의 몰입도가 워 높은 탓에 많은 유저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를 향한 애국심이 벅차오르는 기현상을 호소하곤 합니다. (이렇게 픽션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현상은 하나의 흥미로운 철학적 탐구 주제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루드윅에서도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평생 살아볼 일도 없는 가짜 국가를 향한 애국심 때문에 눈물이 맺히고 있어."

에이스 컴뱃 6의 메인 테마곡은 "The Liberation of Gracemeria(그레이스메리아의 해방)"이라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넘버입니다. 그레이스메리아는 주인공의 조국인 에메리아의 수도입니다. 기습 공격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에메리아군은 조금씩 침략군을 몰아내다가 캠페인 후반부에 이르러 드디어 수도 탈환 작전을 개시합니다. 바로 그 때 이 곡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지요. 한 번 들어보시면 왜 수많은 유저들이 가상의 국가에 이입하며 애국심을 호소하는지 약간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트레일러도 한 번 보세요. Gamespot에서 "21세기 최고의 트레일러 5개"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답니다.)

재미있게도, 출시된지 15년이 지난 이 게임과 테마곡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로 "키이우의 유령(Ghost of Kyiv)" 때문입니다. "키이우의 유령"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개전 30시간 만에 러시아 전투기를 무려 6기나 격추시켰다고 알려진 우크라이나 공군의 에이스 파일럿입니다(통상 5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를 "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에서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지고 우크라이나 정부까지 나서서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이야기는 도시전설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애초에 출처가 트위터인 데다가, "30시간 내에 적기 6기 격추"라는 기록 자체가 제트기와 원거리 유도 미사일을 사용하는 현대 공중전의 특성상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가 "키이우의 유령"이라며 트위터에 공개한 사진.

물론,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가 진짜인지 여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키이우의 유령"은 이제 우크라이나의 영웅적 저항을 나타내는 서사이자 하나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이우의 유령"을 통해 희망을 얻고, 세계인들 역시 이 이야기를 통해 우크라이나인들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그레이스메리아의 해방" 음원 영상의 댓글창도 바로 그런 연대의 현장입니다. 댓글창이 "키이우의 유령"을 향한 응원으로 도배되고 있거든요. 

웅장하고 장엄한 음악, 주인공이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설정,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조국의 수도를 해방시킨다는 서사 등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와 공명하는 부분이 많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실용주의의 도전

지난 주 레터의 내용, 기억하시나요? 지난 주에 우리는 "믿음의 윤리학(ethics of belief)"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믿어야 하는가(how we ought to believe)"라는 질문을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선택한 입장은 바로 증거주의(evidentialism), 즉 우리는 충분한 증거에 의거하여 믿음을 형성해야 할 인식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증거주의는 직관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리고, 클리포드의 사례와 같은 경우를 실로 잘 설명합니다. 

문제는 충분한 증거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이 허용되거나 오히려 올바르게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키이우의 유령" 또한 그러합니다.

"키이우의 유령은 트리거(게임 내의 캐릭터)가 가짜인 것만큼이나 가짜야. 전쟁 프로파간다지. 실존하는 파일럿이 아냐." / "진짜든 아니든, 그 이야기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영감을 주잖아." / "그래도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반 증거에 비추어 보면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는 거의 확실히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증거주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를 믿어서는 안 되는 인식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다소 거북합니다.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가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전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연대하기 위해 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며, 이러한 믿음은 비난 받을 만한 믿음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으로 여겨집니다. "어쨌든 가짜임 ㅅㄱ"라는 식의 반응은 증거주의 원칙에는 충실할지 모르나, 전세계 게이머들이 연대하는 현장에서는 "넌씨눈"처럼 산통을 깨는 행동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물론, "키이우의 유령"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정말 사실로 믿는 것은 아니라고 응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픽션에 이입하고 이를 현실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픽션이 진짜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키이우의 유령" 이야기 또한 일종의 픽션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이를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것이 허용되는 사례로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지만 픽션이 아닌데도 충분한 증거 없이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 나아가 그러한 믿음이 올바른 믿음으로 여겨지는 경우는 많습니다. 다음의 사고실험을 살펴볼까요.

(5) A는 암과 투병중입니다. A는 주치의로부터 "가망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A가 읽은 어느 논문에 따르면, 자신이 암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비관적인 전망을 가진 사람보다 생존 확률이 10%나 더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A는 자신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기로 합니다.

증거주의에 따르면 A는 자신이 암으로부터 회복될 수 없다고 믿어야만 하며, 자신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인식적 의무의 위반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다소 부조리하게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A가 자신이 회복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살펴봅시다.

(6) B는 남극 탐험대원입니다. 어느날 눈앞에 크레바스가 나타납니다. 이미 베이스캠프에서 너무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되돌아가는 것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크레바스를 점프해서 뛰어넘어야만 보다 가까이 있는 전진 기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크레바스의 틈이 생각보다 넓습니다. 뛰어서 건너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지만, 쉽게 건너갈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B는 자신이 크레바스를 건너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인식 태도(doxastic attitude)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믿음(belief), 믿지 않음(non-belief), 그리고 판단의 유보(suspension of judgement)입니다. 증거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믿어야 할 증거가 믿지 말아야 할 증거보다 강할 때에는 믿어야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믿지 말아야 합니다. 양쪽의 증거가 엇비슷하거나 증거 자체가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식적 의무입니다.

이러한 증거주의의 원칙을 따른다면, (6)에서 B는 자신이 크레바스를 건너갈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판단을 유보하여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결론은 위 (5)의 결론과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B가 판단을 유보한다면 그 자리에서 얼어죽고 말 것입니다. B는 어쨌든 자신이 크레바스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야만 합니다. 

B가 스스로를 능이버섯이라고 믿으면 큰일납니다.
B가 스스로를 능이버섯이라고 믿으면 큰일납니다.

(5)와 (6) 같은 사례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ought to believe)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증거가 유일한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A와 B가 오로지 증거만을 믿음의 이유로 삼는 것은 A와 B에게 결코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즉, 증거주의적 태도는 이들에게 결코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A가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 믿어야 하고, B가 자신이 능이버섯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는 믿음이 가지는 실용적 함의를 고려하여 믿음을 결정하여야 합니다. (5)와 (6)은 증거에 의한 이유(evidential reason)만큼이나 실용적 이유(pragmatic/prudential reason)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실용적 이유에 의해서 지지되는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때때로 허용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실용주의(pragmatism)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실용이 증거가 될 때

 (5)와 (6)의 반례만으로 증거주의를 결정적으로 논박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5)와 (6)은 모두 A와 B의 믿음의 내용이 곧 그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경우에 해당하고, 따라서 증거주의에 대한 적절한 반례가 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차근차근 따라가 보도록 하죠. 우선 "증거"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증거"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질문 자체가 철학적 해명을 요하는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고 상식적인 수준의 정의로 만족할 생각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a가 b라는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은 "a는 b라는 믿음이 참일 개연성을 강화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 형사 C는 용의자 D가 살인범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C는 범죄현장에서 피해자의 피와 D의 지문이 묻은 칼을 발견합니다.

(7)에서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은 믿음이고 보라색으로 칠한 부분은 증거입니다.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칼은 용의자 D가 살인범이라는 믿음이 참일 개연성을 강화합니다. 그러므로 칼은 용의자 D가 살인범이라는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 (5)의 사례로 돌아가 봅시다. A가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실제로 A가 회복될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A가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A가 회복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참일 개연성을 강화합니다. 다시 말해, A가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은 A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A는 사실 실용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증거에 의해서 자신이 회복될 것임을 믿는 셈입니다. 같은 논리로, (6)의 B 또한 실용적 이유가 아니라 증거에 의해 자신이 크레바스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와 B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곧 올바른 믿음이라는 우리의 직관을 증거주의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용적 이유가 그 자체로 증거를 제공한다는 이 논변을 편의상 실용적 증거 논변이라고 부릅시다.

실용적 증거 논변이 타당하다면, 실용주의는 (5)와 (6)을 근거로 증거주의를 논박할 수 없습니다.

도박 논변과 진실의 가치

다행스럽게도, 그러나 증거주의에게는 염려스럽게도, 실용주의는 (5)와 (6) 말고도 다른 반례들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실용주의 진영의 어느 유명하고도 고전적인 논변에 따르면, 신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신의 존재를 믿어야만 합니다. 이른바 "도박 논변(Wager Argument)"입니다.

도박 논변 :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신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믿거나 신을 믿지 않는 일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하나의 도박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인생을 걸어야 할까요? 구독자님이 합리적인 도박사라면,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본 뒤 결과값이 가장 높은 쪽을 선택해야만 할 겁니다.

자, 먼저 신이 존재하는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구독자님이 생전에 신을 믿었다면, 구독자님은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구독자님이 신을 믿지 않았다면, 영원한 지옥불에서 고통받게 되지요.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은 경우의 결과값은 (+), 믿지 않은 경우의 결과값은 (-)입니다.

이번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이때에는 신을 믿었든, 믿지 않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무(無)로 돌아가는 운명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므로 결과값은 양쪽 공히 (0)입니다.

신을 믿는다면, 가능한 결과값은 "+/0"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가능한 결과값은 "-/0"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증거가 있든 없든, 결과값의 비교라는 실용적 이유에 의해서라도 구독자님은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공익광고.jpg) 도박 논변에 따르면, 신을 믿는 일은 절대 손해볼 일 없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나 다름없습니다.
(잘못 만들어진 공익광고.jpg) 도박 논변에 따르면, 신을 믿는 일은 절대 손해볼 일 없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나 다름없습니다.

실용적 증거 논변이 도박 논변을 논박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A가 자신이 암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참일 개연성이 증가하지만, 구독자님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은 신이 존재할 개연성을 조금도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박 논변에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통상 제기되는 몇 가지 반론이 있습니다.

(8) 우선,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결과값이 양쪽 모두 0으로 같다는 전제가 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을 믿게 되면 인생의 일부분이나마 종교적 활동에 소비하게 될 텐데, 죽고 보니 신이 없다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 셈이 되겠지요. 따라서 신을 믿는 쪽의 결과값이 항상 더 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9)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 이외에 제3의 선택지가 있음에도 도박 논변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는 것, 요컨대 불가지론(agnosticism)을 견지하는 것 또한 하나의 가능한 선택지입니다. 그러나 도박 논변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적 태도를 "믿음"과 "믿지 않음"의 이분법으로 상정하며, 이는 부당합니다.

물론, 담배를 피우는 제4의 선택지도 있습니다.
물론, 담배를 피우는 제4의 선택지도 있습니다.

(8), (9)가 도박 논변을 결정적으로 논박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는 구독자님이 고민해보실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나아가, 설령 위의 논변들이 타당하더라도 이는 증거주의 대 실용주의라는 논의의 맥락과는 무관합니다. 위 논변들은 도박 논변의 근본적인 주장, 즉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것이 허용되는 때가 있다"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컨대, (8)의 반론은 "신을 믿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으므로 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즉 실용주의적 전제에 선 주장에 불과하지, "신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증거주의적 입장을 따르는 주장은 아닙니다. (8)은 도박 논변이 양쪽 선택지의 실용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지 실용주의 자체를 논박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재미있게도, 도박 논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은 사실 증거주의의 원칙 그 자체가 가지는 직관적 호소력입니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이 손익계산의 측면에서는 일견 합리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계산으로 형성된 믿음이 결코 올바르게 형성된 믿음은 아니라는 강한 직관적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박사의 믿음이 올바르게 형성된 믿음이 아닌 이유는 물론,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도 단지 실용적 이유만으로 형성된 믿음인 까닭이겠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증거주의-실용주의 논쟁의 저변에 깔린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충분한 증거 없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겠는데, 충분한 증거 없이 믿으면 안 되냐는 것이지요. 증거주의가 가지는 규범성, 즉 충분한 증거 없이 믿으면 안 된다(ought not to)는 인식적 의무의 규범성의 원천(source of normativity)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클리포드라면 "충분한 증거 없는 믿음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지난 주의 레터에서 이미 논박된 바 있습니다. 

실용주의는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실용주의의 원칙에 따라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행위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거주의는 다릅니다.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만 믿는 것이 행위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게 해아만 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증거주의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충분한 증거 없이 믿으면 안 될까요? 

증거주의가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논거는 바로 참 혹은 진실의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 of truth)입니다. 참은 단순한 도구적 유용성을 넘어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참을 획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증거에 기반한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이 바로 인식적 의무의 규범성의 원천이라는 주장이지요. 아직은 약간 아리송할 겁니다. 아래에서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진실의 방에서는 항상 정의가 구현되는 것만 보더라도, 진실에는 내재적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진실의 방에서는 항상 정의가 구현되는 것만 보더라도, 진실에는 내재적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믿음을 형성하는 등의 인식 활동의 목적은 무엇까요? 가능한 한 참을 많이 획득하고, 거짓이나 오류를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증거주의자와 실용주의자가 모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우리가 참을 추구하고 거짓을 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용주의, 최소한 어떤 형태의 실용주의는 참에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가 있기 때문에 참을 추구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참을 많이 획득하는 것이 대체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참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래의 사례처럼 말입니다.

(9) 구독자님은 좋아하는 라멘집에 점심을 먹으러 가려 합니다. 이 라멘집은 매주 월요일에 휴무인데도, 구독자님은 휴무일이 화요일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구독자님은 참이 아닌 믿음을 형성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입니다. (9)의 경우 참인 믿음은 구독자님에게 도구적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10) E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정말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면 E는 정신적으로 파괴될 것이고, 아직 고등학생인 딸의 인생도 망가질 것입니다. E는 자신과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애써 아내가 그럴 리 없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경우만큼은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우리에게 보다 도움이 되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허용된다고 실용주의는 말합니다. 

반면 증거주의, 최소한 어떤 형태의 증거주의는 참에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참은 꼭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박 논변처럼 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증거에 근거한 믿음을 형성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참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도구적 유용성과 무관하게 이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참의 내재적 가치에 근거하여 인식적 의무의 규범성을 해명하려는 증거주의의 시도가 성공적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이려면, 증거주의는 참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지를 일단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면, 증거주의는 인식적 의무의 규범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만 하겠지요. 증거주의는 과연 실용주의의 도전을 물리치고 그 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최종적인 판단은 구독자님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이번 레터를 마무리하기 전에, 증거주의에 제기된 또 다른 반론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보려 합니다. 이 반론은 증거주의뿐 아니라 믿음의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반론에 따르면, 증거주의가 타당한지 실용주의나 다른 형태의 믿음의 윤리학이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믿음의 윤리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비의지주의(involuntarism)의 도전

지금까지 읽어주신 구독자님, 감사드립니다. 구독자님의 성원 덕분에 어느덧 루드윅이 다섯 번째 레터를 발행하였고, 구독자는 50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모두 구독자님 덕분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루드윅에서 구독자님만을 위한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아래에서 제시할 챌린지에 성공하면 상품을 드리는 이벤트입니다. 소소한 이벤트라고 했지만, 상품은 전혀 소소하지 않습니다. 상품은 현금 1억 원이며, 챌린지에 성공하는 즉시 구독자님의 계좌로 송금해드릴 예정입니다.

챌린지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시겠지요. 간단합니다. 아래 (11)의 명제를 믿거나, (12)의 명제를 믿지 않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쉬운데 상품이 현금 1억 원이라니! 재미있고 유익한데다 돈까지 거저 주는 철학 레터가 루드윅 말고 또 있을까요?

(11)  2022년 현재, 미합중국은 영국의 식민지이다.
(12) 구독자님은 정말 잘생겼다/예쁘다.

참 쉽죠?
참 쉽죠?

진정하세요. 구독자를 놀려먹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챌린지는 사실 하나의 사고실험입니다. 방금 직접 경험하신 바와 같이, 의지를 발휘하여 (11)을 믿거나 (12)를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1)은 명백히 거짓인 명제이고, 구독자님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한편 (12)는 명백히 참인 명제이며, 구독자님도 이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뜸 "나는 지금부터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라고 믿어야지"라고 결정하거나, "나는 지금부터 내가 잘생기지/예쁘지 않다고 믿어야지"라고 그냥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구독자님, 부럽습니다...
구독자님, 부럽습니다...

물론, 구독자님은 (11)이나 (12)를 믿어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반대 증거를 찾아다니거나, 자기 최면을 걸거나, 거울 앞에 서서 준엄한 목소리로 "는 예쁘지 않다!"를 백 번 외칠 수도 있겠지요. 이런 행동은 모두 의지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아무리 반복한들 구독자님이 의지를 발휘하여 (11)을 믿기로 결정하거나 (12)를 믿지 않기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행여나 자기 최면의 효과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구독자님이 자신의 미모를 의심하게 되더라도,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구독자님은 "나는 예쁘지 않다"는 믿음을 의지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닙니다. 구독자님은 "나는 이제부터 내가 예쁘지 않다고 믿을래"라고 적극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최면에 수동적으로 넘어간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믿음을 형성하거나 포기하는 행위 자체를 자의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한마디로, 믿음 형성은 비의지적(involuntary)입니다. 믿음 형성이 비의지적이라고 보는 이 견해를 믿음에 관한 비의지주의(doxastic involuntarism)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믿음의 비의지성이 우리의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비의지주의는 증거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리지 않고, 믿음의 윤리학이라는 주제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다음의 두 사례를 비교해 봅시다.

(13) F는 열차 운전사입니다. 어느날 운행 중 브레이크가 고장났고, 손쓸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침 기찻길에서 작업 중이던 H는 열차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4) G는 열차 운전사입니다. 그가 운행하는 열차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F는 미리 브레이크를 밟아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졸음운전을 하느라 G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H는 열차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3)과 (14)에서, G는 H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F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G는 H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지만, F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의무를 지우려면 일단 그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여야만 합니다. 철학자들은 이를 "의무는 가능을 함축한다(ought implies can)"는 원칙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의 윤리학의 모든 논의는 우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믿음을 형성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러한 의무를 지우기 위해서는, "의무는 가능을 함축한다"는 원칙에 따라, 믿음을 의지적으로 형성하는 일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비의지주의에 따르면 믿음은 결코 의지로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비의지주의가 참이라면 증거주의든 실용주의든 믿음의 윤리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가짜뉴스 좀 믿으면 어때서?

길었던 논의를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클리포드의 원칙, 즉 도덕적 의무와 인식적 의무를 동일하는 원초적인 형태의 증거주의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우리는 도덕적 의무와 구별되는 인식적 의무의 독자성에 근거하여,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행위는 인식론적 의무의 위반"이라는 인식론적 증거주의의 입장을 발전시켰습니다.

인식론적 증거주의는 곧이어 실용주의의 도전에 부딪히게 되었고, 실용주의가 제시하는 일부 반례를 실용적 증거 논변으로 성공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지만, 실용적 증거 논변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도박 논변의 반론에 직면합니다. 도박 논변은 인식론적 의무의 규범성의 원천에 관하여 증거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용주의, 적어도 어떤 형태의 실용주의는, 참된 믿음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한에서 가치를 갖는 것이므로 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행위가 허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증거주의, 적어도 어떤 형태의 증거주의는 참의 내재적 가치에서 인식적 의무의 규범성을 발견합니다. 참은 그 자체로 가치있기 때문에, 참된 믿음이 실용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증거주의의 원칙을 따를 인식적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논의가 과연 성립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믿음의 비의지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믿음 형성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의무는 그 행동이 선택 가능해야만 부과할 수 있다는 원칙이 참이라면, 규범성을 전제하는 "믿음의 윤리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철학적 사고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료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서두의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왜 가짜뉴스를 믿어서는 안 될까요? 가짜뉴스를 믿는 행위가 특별히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경우에도 가짜뉴스를 믿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가짜뉴스를 믿는 행위는 그 믿음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때에도 여전히 잘못된 행동일까요? 아니, 가짜뉴스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규범 자체가 과연 성립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더 읽을거리

증거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클리포드의 『The Ethics of Belief』, 실용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제임스의 『The Will to Believe』가 믿음의 윤리학의 뿌리가 되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책은 클리포드의 책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의 형식으로 쓰인 책으로, "충분한 증거"와 "실용적 이유" 사이의 논쟁이 믿음의 윤리학의 태동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 소개된 "도박 논증"은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에 등장합니다.

믿음의 윤리학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개론서는 (제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학제적 성격이 강한 탓에 체계적으로 개괄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독자적인 개론서가 나올 만큼 굵직한 주제는 아니기 때문인 듯합니다. 길잡이 삼을 만한 기본 문헌이 별로 없다 보니 독학하기에 적절한 주제는 아닙니다. 다만 국내에 출판된 개론서 가운데에는 스티븐 D. 헤일즈의 『이것이 철학이다』 제7장 전반부에서 (놀랍게도) 믿음의 윤리학을 꽤나 정치하게 소개하고 있어, 출발점으로 삼기 좋습니다. 번역이 약간 난삽하다는 단점만 빼면 분석적 전통의 철학 전반을 다루는 개론서로 매우 추천할 만한 책이기도 합니다. 한편, 학술적으로는 스탠포드 철학 백과의 「The Ethics of Belief」 항목이 거의 유일하게 시작점으로 삼을 만한 문헌입니다. 

믿음의 의지성/비의지성 문제는 인식 정당화와 관련하여 인식론에서 매우 중요하게 논의되는 문제로, 거의 모든 인식론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병덕 선생님의 『현대 인식론』을 추천하며,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여기에 실린 참고문헌들을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참고로, 학계에서 통용되는 "doxastic involuntarism"의 번역어는 "믿음의 불수의성/불수의주의"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러한 용어가 매우 생소하고 의미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비의지성" 등으로 옮겼습니다.

아래에서는 이번 레터 작성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참조한 문헌들 중 읽어볼 만한 문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대부분은 이 분야에서 널리 읽히고 인용되는 문헌이기도 하나,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므로 큰 관심이 없다면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현대 증거주의는 Feldman & Conee, 「Evidentialism」이 무난한 출발점입니다. 위 논문을 포함해 Feldman과 Conee의 여러 에세이가 수록된 『Evidentialism: Essays in Epistemology』는 좋은 참고자료입니다. Goldman이 편집한 『Social Epistemology: Essential Readings』에 수록된 Feldman의 「Reasonable Religious Disagreements」는 증거주의 원칙이 공적 생활에 어떻게 응용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에세이입니다. 

다음으로 여러 규범들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문헌들을 소개합니다. Haack의 「"The Ethics of Belief" Reconsidered」는 인식적 규범과 도덕적 규범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논의합니다. 증거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의 관계는 Marusic의 「The Ethics of Belief」, Reisner의 「Weighing Pragmatic and Evidential Reasons for Belief」가 간결한 개괄을 제공합니다. Marusic은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Shah, 「A New Argument for Evidentialism」은 증거주의의 규범적 원천을 밝히는 동시에 실용주의에 대한 신선한 비판을 제기합니다. 개인적으로 Shah의 논증을 흥미롭게 읽었고, 참의 내재적 가치에 근거하여 규범성의 원천을 밝히는 시도보다는 이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느껴집니다.

Alston, 「The Deontological Conception of Epistemic Justice」와 Williams, 「Deciding to Believe」는 믿음의 비의지성 논변을 펼치는 고전적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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